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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주여서 좋다
제주도 겨울 속 봄 여행

그냥 제주여서 좋다<BR />제주도 겨울 속 봄 여행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그냥 제주여서 좋다 

제주도 겨울 속 봄 여행



누군가 그랬다. 추억을 하나둘씩 꺼내 보며 사는 사람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사람이라고.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춘은 짧다는 것이다. 짧으면 10년, 길어야 20년 아닌가. 겨울에 봄날이더 그리운 까닭도, 넋두리처럼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짧은 청춘을 향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봄날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러 제주도로 겨울 속 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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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담에 내려앉은 선혈 같은 동백꽃



소녀가 남긴 선물, 위미 동백 군락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이문세의 노래 <소녀> 중에서 


고등학생 때였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밥 먹듯 항상 틀어놓은 까닭에 이문세 노래 테이프는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났다.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공부는 핑계일 뿐 머릿속에는 노래만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청춘이라면 색깔만 다를 뿐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기에. 

몇 해 전의 일이다.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94>,<건축학개론> 등 8090세대를 타깃으로 한 문화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때를 아십니까’는 너무 먼 과거가 되었고, 7080세대 역시 중심세력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8090세대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꽃 같은 청춘의 시간은 아름다운 계절로 기억될 것이다. 

황량한 겨울, 마음 한구석 뻥 뚫린 허공 속으로 찬바람이 불어온다면 동백꽃이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제주도 남쪽에는 봄을 부르는 동백꽃이 한창이다. 특히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위미 동백 군락지’가 유명하다. 이곳에 동백꽃을 심은 사람은 1875년 17세 꽃다운 나이에 위미리에 시집온 현병춘이다. 해초 캐기와 품팔이를 해근근이 모은 돈 35냥으로 황무지를 사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살기 팍팍했던 그때 제주의 겨울바람은 몹시도 모질고 거칠었다. 어린 새댁 현병춘은 어떻게든 그 몹쓸 바람을 막아야 했으리라. 고민 끝에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가 정성껏 뿌렸다. 동백나무가 자라면 방풍림 역할을할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그렇게 심었던 동백나무가 오늘날 울창한 동백 숲이 되었다. 현병춘은 떠났지만, 동백은 140년의 세월만큼 훌쩍 커버렸다. 그녀가 남긴 동백은 지금까지 우리들 곁에 머물며 꽃을 피운다. 17세 소녀가 남긴 선물인 셈이다. 동백꽃을 마주하면 찬바람에 움츠렸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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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0m에 이르는 동백터널은 카멜리아힐의 으뜸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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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동백꽃에 이미 봄이 온 듯 착각 속으로 빠져든다

애기동백, 젊음은 꽃보다 눈부시다 

위미리 동백군락지 근처에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감귤밭 중앙에 조성된 애기동백 군락이다. 위미리에 심긴 동백꽃이 꽃송이 채 떨어진다면 애기동백은 꽃잎이 한 장씩떨어진다. 선혈 같은 동백꽃도 예쁘지만, 연분홍색 애기동백도 예쁘다. 수줍은 미소를 띤 소녀처럼 청순미가 전해진다. 

애기동백은 원래 사유지에 조경을 목적으로 심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동백꽃 명소가 되었다. 이곳의 특징은 그림책에서 봄직한 핑크색 동백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 마냥 줄을 맞춰 선 모습이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융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드넓다. 쉽사리 밟으며 지나가기가 미안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숲속에 있으면 은은한 꽃내음이 버무려져 황홀감에 빠져든다. 여기저기서 꽃보다 예쁜 청춘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동백이 화사한들 젊음의 순간만큼 아름다울까. 알알이 영근 황금색 감귤밭 뒤로 애기동백꽃에 파묻힌 젊은 미소가 샘나게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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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싱그러운 티뮤지엄의 녹차밭



사계절 푸른 찻잎의 꽃말은 추억 

겨울 제주다운 풍경은 세 가지 색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하양, 검정, 초록이다. 하얀색은 겨울 왕국이 부럽지 않을 설경이겠지만 한라산을 제외하면 영하로 떨어지는 곳을 찾기 어려우니 밤새 눈이 내려도 다음날 정오를 못 넘긴다. 그래서 제주의 하얀색은 늘 아쉽다. 

검은색은 제주도의 돌 빛깔이다. 제주의 돌은 태곳적부터 제주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농담 차는 있지만 모두 검다. 검은색이 뽐내는 빼어난 전경을 보려고 위미항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제지기오름에 오른다. 올레길6코스 구간인 이곳은 뭍사람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다.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여기서만큼은 제주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보자. 

해안을 따라 시커먼 돌로 담을 쌓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쌓은 돌담 안으로 지붕이 납작 엎드려 있다. 바람을 피하기 좋은 구조라지만 그런 건축적 의미보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오는 감상적 의미가 더 크다. 빠른 걸음이었다면 지나쳤을 소소한 풍경에 발걸음이 더 느려진다. 정상까지는 15분 정도를 오른다.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자 탄성이 터진다. 아기자기한 보목포구와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섶섬이 장관이다. 서쪽은 조각천을 이어붙인 듯 검은 돌담이 이어지고 북쪽은 제주의 심장, 한라산이 보인다. ‘그냥 제주여서 좋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 싶다. 

마지막 여정은 제주의 초록색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동백잎이 사철 푸르듯 녹차밭도 그러하다. 녹차의 꽃말은 ‘추억’이다. 앞서 보낸 찬란했던 봄, 여름, 가을을 향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꽃말일까. 겨울에 보는 녹차밭의 푸름은 지난 계절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제주도는 일본 후지산, 중국 황산과 더불어 세계 3대 녹차재배 지역으로 꼽힌다. 제주도 중에서도 서귀포시 안덕면서광차밭이 유명하다. 이곳에 오설록 티뮤지엄이 있다.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차 박물관이다. 티뮤지엄의 자랑거리는 건축물은 물론이고 안팎의 빼어난 경관에 있다. 그 덕분에 세계적인 건축 전문사이트인 ‘디자인붐’이 선정한 세계 10대 미술관에 선정되었다. 오설록 티뮤지엄에서는 차 덖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그윽한 향이 온몸을 휘감으면 차향에 기분까지 산뜻해진다. 뮤지엄 밖은 가볍게 산보를 즐기기 좋다. 삭막한 겨울에 초록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짧은 제주 여행을 통해 긴 겨울을 이겨낼 힘을 얻고 돌아간다.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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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럽게 영근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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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오설록 녹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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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기오름에서 섶섬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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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찻잔이 전시된 티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