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3·1운동 직후 <BR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Ⅲ. 3·1운동의 발발과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②



3·1운동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열기는 크게 고조되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한인사회의 중심기관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4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가 새 중앙총회장 윤병구가 선출된 10월 2일까지 중앙총회장 임시대리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내외 선전·외교활동과 일본물화배척운동 

백일규는 1919년 4월 4일 15차 임시위원회에서 서재필·이승만·정한경이 추진하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파견 대표로 민찬호와 윤병구를 선정해 파견했다. 현순의 전보(3월 29일 자)를 통해 ‘대한국민공화국 정부’ 수립 사실이 전해지자, 중앙총회는 4월 5일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4국 정부 수반과 대사에게 임정 수립 사실을 알렸다. 또 4월 10일에는 “각하께서는 세계의 자유와 공의를 주창하는바 우리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여 우리 민족의 명의로 청원하나이다. 한국독립단은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정부의 내각들은 다 고등한 학식과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 만일 독립을 승인하면 능히 공화정부를 유지하여 갈 수 있습니다”라 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 같은 내용의 호소는 한국 민족은 능히 독립할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총회는 임시정부 수립 경축일을 4월 15일로 정하고 북미 전 지방회에 통보했다. 하와이지방총회의 『국민보』 기자 승룡환이 『일포시사(日布時事)』에 한·중·일 3국의 협력으로 백인들을 배척하자는 글을 싣자 중앙총회는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에게 공문(1919.04.17.)을 보내, 그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반대되고 외교 진행에 방해되므로 조사해서 시정하라는 조치를 명했다. 일본과는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중앙총회는 1919년 4월 21일 회의에서 항일운동의 표시로 일본물화(物貨)배척운동을 결의하고 공문 제205호(1919.04.25.)로 전 미주 한인들에게 일본물화배척운동을 촉구했다. 일본물화배척운동은 매매, 노동, 사업, 개인 간의 교제, 그리고 식물과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정신부터 행동까지 일본인과의 거래를 완전히 배척하는 강력한 항일활동이었다.


독립의연금 모금 운동과 재정지원 

3·1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은 여러 활동 중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1월 24일 뉴욕과 파리에 한인 대표를 보내기로 하면서 시작된 ‘특별의연금’ 모금 활동은 3·1운동 직후 ‘독립의연’이란 이름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그 외 ‘21례’, ‘애국금’, ‘인구세’, ‘공채금’ 등의 명목이 추가되어 다양한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중앙총회가 제1기(1918.11.24.~1919.12.15.)와 제2기(1919.12.16.~1920.07.01.)로 나누어 보고한 결산을 보면 먼저 제1기의 경우 총수입은 88,013.53달러, 총지출은 84,045.42달러였다. 총수입 중에는 미국인 7명이 낸 73달러와 중국인 화교 7,756.74달러를 포함한다. 다음 제2기의 경우 총수입 26,873.52달러, 총지출 26,790.34달러였다. 제1, 2기를 합하면 총수입 114,997.02달러, 총지출 110,835.76달러, 잔액 4,051.26달러가 된다. 제1기와 2기의 지출 내역을 보면 임시정부에 46,454.06달러, 구미위원부에 2,000달러, 파리의 김규식외교비로 4,000달러, 안창호·정인과·황진남 3인의 원동(상하이)대표 휴대금 3,000달러, 필라델피아통신부 8,100달러 등이다. 내역에 따르면 중앙총회는 전체 수입 중 40%를 임시정부로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총회가 밝힌 의연자는 외국인(미국인과 화교)을 제외하고 총 1,391명이다. 이는 제1기만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제2기의 경우 제1기 납부자와 중복되어 1기로만 한정한 수치이다. 이 수 안에는 일부 하와이 한인의 이름도 보인다. 한편 하와이의 경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독자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지방총회가 발표한 재정결산서(1919.03.~10.31.)를 보면 총 2,907명의 의연자에 총수입 35,034.05달러, 총지출 34,565.49달러이다.지출 내역을 보면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해 활동 중인 이승만에게 22,000달러, 파리의 김규식에게 2,000달러, 중앙총회에 1,500달러, 상하이의 현순에게 1,360달러등이다. 전체 수입 중 약 63%를 이승만에게 집중적으로 보냈다. 이로 보아 하와이지방총회는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의연 모금운동을 추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 이승만이 주도한 구미위원부가 독자적으로 모금한 실적도 있지만, 다음에 밝힌다.


독립의연금 모금 운동의 가치 

이상의 모금 활동과 실적을 감안할 때 멕시코를 포함한 1919년도 전 미주 한인 약 8,500명 가운데 약 4,298명이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절반 이상이 되는 수치이다. 여기에는 성인 남녀는 물론이고 어린 학생과 아이들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안창호 집안의 경우 15살 장남 안필립이 3달러, 차남 필선이 1달러, 6세의 장녀 수산이 1달러를 의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한인들의 평균 임금은 하와이의 경우농장 노동자가 40~60달러, 북미의 경우 광산이나 철도 노동자가 70~90달러 전후였다. 당시 1달러는 2020년의 시세로 환산할 경우 약 15배의 가치가 되는데 중앙총회의 총수입 114,997달러는 현 시세로 약 173만 달러 정도다. 북미 한인 전체 인구가 약 2,500여 명이고 한인들의 평균 수입이대체로 영세했음을 감안할 때 매우 큰 금액이었다. 중앙총회에서 밝힌 3·1운동 시기 미주 한인사회 최대의 의연자는김종림(3,345달러), 신광희(1,245달러), 임준기(1,220달러), 김승길(1,010달러)이다. 모두 쌀 농장 경영자들이며,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의연 공로자로 표창 받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모인 각계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새로 수립하고 정비하는데 사용한 막대한 금액은 바로 미주, 즉 북미의 한인들로부터 나왔다. 중앙총회의 재정결산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3·1운동 직후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은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으로 크게 분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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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발행한 독립의연금 증서(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