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BR />거부한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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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새넌 맥큔

(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

1873.12.15. ~ 1941.12.04.

미국건국훈장 독립장(1963)


* 조지 새넌 맥큔은 맥큔 또는 맥윤(McCune)이라는 영어 발음에서 윤(尹)을,

새넌(Shannon)이란 영어 발음에서 산온(山溫)을 선택해 윤산온(尹山溫)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였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조지 새넌 맥큔은 선교사로 입국해 3·1운동을 지원하고,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 일제 무단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다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은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05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5년 9월 아내 헬렌 베일리 맥아피(HelenBailey McAfee)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평양에 자리를 잡은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숭실학교 교장인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를 도와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며 숭실학교와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생들의 자립과 자조를 위한 실업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자신과 신성학교 학생·교직원등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맥큔은 이 사건을 미국 선교 본부에 보고하고, 일제의 무단통치 실상을 해외 언론에 알려 재판이 일제 의도대로 진행될 수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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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 판결문(필사본)(1912.09.28.)



3·1운동을 지원하고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맥큔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일제의 가택 수색을 거부하며 체포되지 않게 보호하였다. 그리고 3·1운동 당시 목격한 일제의 탄압을 미국 The Continent 잡지에 게재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이뿐 아니라 1920년 9월 1일 방한한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보이기 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광복군총영 소속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治毅)가 사형 판결을 받자 이를 변호하였다.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극단적 배일자(排日者)’로 분류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던 맥큔은 잠시 한국을 떠났다가 1928년 다시 돌아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직을 겸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일제가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하자 1936년 1월18일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교육 당국에 제출하고 결국 교장직에서 파면당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맥큔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강연과 논설 기고 등을 지속하다 1941년 12월 서거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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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큔 교장, 숭실학교 교직원 및 학생들(1933,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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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큔 교장과 숭실대학 관악대(1934,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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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학교 교장 파면 기사(『조선중앙일보』, 

1936.01.21.,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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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큔의 편지가 시카고 잡지에 게재된 경위에 대한 기사(『신한민보』, 19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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