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독립의 꿈을 싣고
하늘을 날다

독립의 꿈을 싣고<BR />하늘을 날다


글 홍윤정 심산김창숙기념관 학예실장



독립의 꿈을 싣고

하늘을 날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벅찬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조국을 빼앗긴 한국인들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한국인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이 학교의 이름을 “비행기 학교”라고 불렀고, 한국독립운동사는 최초의 한인비행사양성소라고 표현해왔다. 비행학교는 상하이의 『독립신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및 일본의 사찰 기록, 독립운동가의 증언 등을 토대로 연구가 진행되어 올해 창군 71년을 맞는 공군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국땅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비행학교

비행학교의 설립은 이역만리 미주 한인들뿐만 아니라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들의 투철한 항일정신과 민족주의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비행학교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향후 전쟁에서는 비행전투력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 인류적 인식을 수용한 미주 한인들이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빼앗긴 조국을 회복하겠다는 염원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미주 한인사회는 19세기 가뭄과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서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했던 이주민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조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으며, 국외에서 1905년 외교권 상실의 직격탄을 맞아 국망의 수치를 느끼는 한편 자신을 지켜줄 조국의 간절함을 체험했다. 이러한 이주 한인들의 조국회복을 위한 헌신의 결정체가 바로 이 비행학교인 것이다.

미주의 한인들은 1920년대 미국 사회의 엄격한 민족적 차별을 견뎌내며 자주적으로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투입될 한국인 전투 비행사, 즉 독립공군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비행술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는 인류 문명 최첨단 그 자체였다.

1920년대 미국 곳곳에서 사설 비행학교가 운영되었는데, 윌로우스의 ‘비행기 학교’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는 종종 역사에서 영웅을 만나곤 한다. 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에도 그러한 영웅들이 있다. 학교 설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이민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미주 한인 전체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비행학교 설립에 군사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노백린 장군, 학교의 부지와 비행기 및 운영자금을 조달했던 라이스 킹 김종림,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비행학교 운영을 책임졌던 곽림대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던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 총판 안창호도 비행학교의 영웅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통찰력도 미주 한인사회라는 기반이 없었더라면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비행학교 설립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했다. 그리고 그해 2월 20일 독립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독립공군을 양성하는 비행학교가 독립운동이 이루어지던 해외 한인사회 중 국내와 물리적으로 가장 먼 미주에 실현된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9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각지의 독립군을 군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육군 안에 비행대를 편성하여 선전 활동에 투입하고자 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 운영을 맡았던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 비행기 구입 등에 대한 임시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윌로우스의 비행학교 설립이 구체화될 때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는 이동휘였는데,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임시정부에서 실질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군무총장이던 노백린은 윌로우스에서 군사전문가로서 비행학교 설립에 관여하였다. 비행학교는 윌로우스 한인 300명을 편제한 군대와 함께 운영되었으므로, 비행학교와 군단은 독립전쟁 원년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주 한인사회 기반 위에 설립한 군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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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6인과 노백린(1920)



독립전쟁에 대한 노백린의 신념 

노백린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선임되었을 당시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가 아닌 하와이에서 독립군양성에 매진 중이었다. 군무총장 선임 후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미국 본토로 이동했다. 노백린은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한 현장경험을 가진 군사전문가였다. 그는 숭무주의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양의 둔전제적 군사제도에 관한 전문가로서 의무병제를 주장해 왔다. 유학 시절 유학생 잡지 『친목회회보』에 중국의 둔전제에 관한 소논문을 실었고, 『서우』에도 의무병제를 다룬 프랑스 역사서 「애국정신담」을 번역·연재하여 의무병제에 대한 신념을 피력했다. 독립군 양성에도 둔전제와 의무병제를 적용, 윌로우스에서 한인 전체를 군사 조직으로 편제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를 지휘할 사관과 비행사를 양성하는 곳이 비행학교였다. 노백린은 군무총장으로 상하이에 부임한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인 전체를 군대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등 독립전쟁의 근간은 의무병제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군인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료였다. 

비행학교 운영과 설립에 관여했던 곽림대의 회상에 의하면 1920년 1월 하와이에서 미주 본토로 이동했던 노백린을 만나 함께 윌로우스에 가서 군단과 비행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노백린은 일본과 ‘거국일치 결사전’을 치르려 했고, 노백린을 따라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입학한 항생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의 ‘거국일치 결사전’의 내용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 황궁으로날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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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군무총장 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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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학교 운영을 담당한 대한인국민회 총무 곽림대

비행학교의 운영과 한인들의 지원 

1920년 2월 20일 노백린, 김종림, 곽림대 등은 윌로우스와 미주 한인사회의 지원으로 독립군단(일명 호국독립군단, 노백린군단)과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실제로 수업을 시작했다. 2월 캘리포니아 교육국으로부터 퀸스디스트릭트 건물을 빌렸다. 해당 학교는 이민자를 위한 학교였으나 당시에는 폐교된 상태였다. 6월에는 구입한 2대의 비행기가 비행학교에 도착했다. 비행학교에서 사용한 비행기는 미국 스탠다드사의 스탠다드J-1기종이었다. 이는 1916년부터 생산된 최첨단 훈련기종으로 당시 6,000불 정도를 호가하던 비행기였다. 비행기 구입과 학교 부지 등 운영자금은 김종림이 부담했고, 대한인국민회에서도 매달 600불씩 군단과 비행학교를 지원했다. 따로 후원을 위한 모금도 진행했다. 군단과 부지는 당시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종림이 빌린 40에이커의 부지에서 시작되었다. 김종림은 군단과 비행학교 설립을위해 40에이커의 부지 외에 20,000불의 초기 자금을 대고, 매달 3,000불의 군단과 학교 운영자금도 지원하였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교관이었던 프랭크 브라이언트를 초빙하고, 한국인 비행사이용선, 오림하, 이초, 노정민, 박낙선, 우병옥을 교관으로 채용해 학생들에게 교련, 전술과 전략,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군무총장 노백린은 군단과 비행학교가 설립되던 2월부터 상하이의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미주의 군대 설립과 비행학교 준비 상황을 알리고 지휘를 받았다. 

김종림 등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로 부를 축적했다. 그것이 비행학교를 운영하는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박용만과 노백린 등 군사전문가들은 미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왔다. 1920년 초 3·1운동으로 고무된 캘리포니아 한인들은 쌀농사 성공으로 마련된 경제적 토대 위에 고조된 독립운동의 열기를 모아 독립군 양성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 상하이로 부임하는 길에 캘리포니아를 들른 노백린을 통해 군단 설립이 구체화 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군을 이끌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무장독립투쟁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윌로우스 군단은 한인 300여 명을 군사조직으로 편제해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비행학교는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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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스 비행학교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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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스 비행학교 활주로 현재 모습

폐교 후에도 이어진 독립전쟁의 꿈 

『신한민보』에 의하면 노백린이 상하이로 떠난 후 윌로우스 군단은 해체되고, 비행학교는 비행가양성사와 비행가양성소로 계승되어 이듬해 4월경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자 군사전문가인 노백린이 편제했던 군단이 노백린 부재 후 바로 폐쇄되고 비행기학교만이 비행가양성사와 비행기양성소로 계승되었다는사실은 당시 윌로우스 한인사회에 노백린 외에 군사전문가가 없었음과 남은 한인들도 군단을 유지할 의지와 재정적 기반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김종림과 곽림대 등은 비행가양성사와 비행사양성소를 통해 15명의 청년에게 비행술을 교육했다. 41명의 사원을 갖춘 비행사양성소는 졸업자들에게 임시정부 비행사로 1년 이상 근무하게 하는 의무복무제도를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사양성소는 존립기한으로 정했던 2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에게 학생들의 비행 연습을 위한 비행기 수리와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그러나 쌀농사 실패로 경제적 파산을 맞은 한인사회는 비행기 수리비 등을 마련하지 못했고, 비행사 지망생이었던 박희성의 추락사고가 발생하는 등 윌로우스 한인사회는 비행사양성을 위한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비행사를 지망했던 한국청년들은 대한인비행가구락부(K.A.C.,Korean Aviation Circle)와 청년혈성단, 한국독립공군 등 또 다른 조직과 함께 독립전쟁에 비행사로 참여할 꿈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 박희성과 이용근은 1921년 7월 18일 임시정부의 육군비행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김자중은 국제비행사가 되어 동삼성 장작림의 항공대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 2월 20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우리 한인들은 극심한 민족차별을 견뎌내면서 독립공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조국에서 살 수 없어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었지만, 조국의 존재가 누구보다 간절한 한국인들이기도 했기에 조국 광복의 꿈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독립공군 양성에 쏟아부었다. 그 헌신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우리는 그들이 꿈꾸던 조국의 미래를 실현해 나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