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추억

낙지의 맛있는 위로

낙지의 맛있는 위로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낙지의 맛있는 위로




가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해산물로 전어와 대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여기에 낙지를 빼놓지 않았다. 낙지는 갯벌의 산삼이라 불리며보양음식으로 사랑받았다. 먹으면 기운이 솟는 다는 낙지. 서민들의들끓는 애환을 달래고 힘이 되어준 것도 이 여덟 다리를 가진 산삼이었다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낙지 사랑

우리나라 사람들은 낙지를 정말 좋아한다. 일단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낙지볶음·낙지회·낙지 탕탕·낙지 호롱이·낙지 연포탕 등 당장 생각나는 요리법만 해도 여러 개다. 중국이나 일본은 문어와 낙지를 구분하지 않는 반면 우리는 문어와 낙지, 심지어는 주꾸미까지 세분화했다. 그만큼 우리가 낙지, 또는 해산물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낙지 사랑의 역사는 꽤 뿌리가 깊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 ‘탐진어가(耽津漁歌)’를 남겼다.


"어촌 마을에서는 모두 낙지로 국을 끓여 먹으며,붉은 새우와 맛 조개는 쳐주지도 않는다."


바다의 참맛을 아는 바닷가 사람들이 대하나 맛 조개 따위는 쳐주지도 않고 낙지를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흑산도로 귀양을 간 정약용의 형 정약전 또한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낙지는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며, ‘낙지를 먹으면 쓰러져 가는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두 형제의 낙지 예찬이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홍길동 전』을 쓴 허균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도문대작이라고 하여 팔도의 맛있는 음식을 품평한 글을 남겼다. 여기에 낙지에 대한 평가는 고작 한 줄뿐이다. 낙지는 서해안에서 잡히는데, 맛 좋은 것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적을 필요가 없다며 평론을 생략한 것이다. 즉, ‘두말하면 잔소리란’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낙지를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낙지가 특별히 더 맛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먼 옛날부터 한반도 낙지는 특산품으로 이름을 떨치며 발해와 당나라와의 교역품목에서 빠지지 않았다.


무교동 낙지와 조방낙지

많은 낙지 요리 중에서도 아마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낙지볶음’일 것이다. 그리고 낙지볶음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것이 서울 무교동 낙지와 부산 조방낙지다. 이들 낙지요리는 무엇보다 우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부산의 명물, 조방낙지의 ‘조방’은 낙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선방직(朝鮮紡織)의 준말이다. 방직공장의 이름이 낙지에 붙다니,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부산시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 자리에 조선방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인이 세운 회사로, 가혹한 노동조건과 노동탄압으로 악명높았다. 그리고 공장 옆에는 낙지볶음 골목이 있었다. 조선방직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퇴근 후 이곳에서 끼니를 때웠다. 자유시장이 들어선 후에는 외지 상인들이 낙지볶음으로 요기를 했다. 이들이 각자의 생업 터전으로 돌아가 입소문을 내면서 전국적으로 조방낙지가 유명세를 탔다.

무교동 낙지는 서울 무교동과 서린동 일대에 있던 낙지 골목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많이 사라졌다지만 이곳 역시 좁은 골목 사이로 낙지볶음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대학생과 월급쟁이들의 집합장소였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매콤한 낙지볶음을 안주 삼아 찌그러진 양은 술잔에 막걸리를 담아 마셨다. 사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음식점이 발달한 곳으로 과거를 보러 온 선비들이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199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음식 거리였으니, 이곳에 추억을 묻은 이들도 많을 터였다.

일제강점기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과 시장 상인들의 치열한 하루, 그리고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추억까지. 낙지가 서민음식이라 불린 이유는 단지 서민들이 즐겨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지에는 그 시절 눈물 나게 맵고 쫀득쫀득 고소한 낙지볶음의 맛을 닮은 서민들의 애환이 있다.

올가을에는 낙지볶음을 추천한다. 제철을 맞아 맛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녹녹치 않은 세상살이를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