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그 옛날 걸음의 의미

그 옛날 걸음의 의미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그 옛날 걸음의 의미



  

자동차·기차·비행기 등. 지금이야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달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 길도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일까? 그 옛날 잘 걷는다는 것은 제법 유용한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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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걸음으로 출셋길에 오른 이용익         



걷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KTX를 기준으로 하면 보통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제 다리에만 의지한 채 20일을 걸었다.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렇게 수일을 걸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반드시 괴나리봇짐을 챙겼다. 괴나리봇짐은 여정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은 작은 봇짐이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나는 선비들의 봇짐에는 노잣돈·종이·먹·붓·벼루·좁쌀책 등이 들어 있었다. 좁쌀책은 지도와 병이 났을 때의 응급처치법이 담긴 책이다. 소매에 넣고 언제든 펼쳐볼 수 있도록 아주 작게 만들어졌다. 여기에 짚신을 매달면 괴나리봇짐이 완성되었다. 짚신은 하루 이틀만 신어도 닳아버리기 때문에 여분의 신이 꼭 필요했다.

걷는 것이 이동의 전부였던 시절, 걷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황급한 일이 발생하면 편지나 문서를 들려 달리게 하거나 입으로 전하도록 하는 ‘비각’이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보통 100리를 달렸다. 비각은 떠나기 전에 가느다란 노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노끈을 풀지 못하도록 매듭지어진 곳에 도장까지 찍어두었다. 팔의 아픔을 느끼게 해서 걸음을 재촉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습속을 ‘봉비’라고 한다. 봉비는 원시적인 통신 수단으로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에는 고려 의종 때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가 군사로 뽑혀 서울로 올라갈 적에 느낀 봉비의 고충이 기록되어 있다. 재상 최홍재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정중부의 팔이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어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 정중부를 왕의 근위병인 공학금군에 임명하였다.

개화기에는 사주인이라고 해서 낙향한 권신의 집과 서울 본가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사설 비각이 있었다. 이들도 팔을 베로 묶어 통증을 느끼도록 했다. 눈에 띄는 것은 팔을 베로 묶은 다음 그 속에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신표를 넣었다는 점이다. 신표에는 ‘교동 아무개 재상 댁 사주인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어디든 무사통과했고 관가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물장수는 어떻게 출셋길에 올랐나

조선 말, 비각 출신은 아니지만 빠른 걸음 덕분에 출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용익이다. 이용익은 한말의 정치가로 황실 재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명성황후를 찾아와 말했다.


“중전마마, 물장수 가운데 걸음이 무척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500리 길을 11시간 만에 간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500리라면 보통 5~6일이 걸릴 텐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그 물장수는 전라도 전주에서 한양까지 11시간 만에 올라왔답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이 물장수 이야기를 전했다. 고종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그를 시험해보자고 제안했다.


“전주 감사에게 봉서를 내리시고, 그 답서를 물장수에게 시켜 한양으로 가져오게 하는 겁니다. 답서에는 반드시 물장수가 전주 감영을 출발한 시간을 적어 보내라 하고요.”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킨 대로 전주 감사에게 부채 1,000개를 만들어 바치라는 내용의 봉서를 내렸다. 그리고 걸음이 빠르다는 물장수를 시켜 한양으로 답서를 보내라 분부했다. 전주 감사는 물장수가 전주 감영을 출발할 때 시간을 적어 보냈다. 오전 7시였다. 답서가 궁궐에 도착한 시각은 당일 오후 6시.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전주에서 한양까지 11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 물장수가 바로 함경북도 명천의 가난한 말 장수의 아들 이용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걸음이 빨라 말꼬리를 잡고 뛰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경기도 장호원으로 피난을 갔을 당시, 이용익의 특기가 발휘되었다. 그는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보내는 편지와 답신을 신속하게 배달했다. 명성황후는 감사의 의미로 그에게 정6품 감관 벼슬을 내렸다. 그 뒤에도 이용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으며 탁지대신·군부대신을 맡는 등 출셋길을 걸었다.


독립을 향해 걷고, 또 걷다

빠른 걸음 하면 생각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먼저 강원도 춘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유덕이다. 그는 기미년 3·1 만세운동 때 춘천 경찰서 순사였다. 3·1 만세운동으로 수십 명이 경찰서에 잡혀 오자 그들을 모두 풀어주고 만주로 달아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9년, 박유덕은 다시 국내로 돌아와 만세운동 10주년을 기념하며 화천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세운다. 수천 장의 격문을 뿌리는 거사를 모의하다가 발각, 서울로 피신했으나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박유덕에 관한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한 번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전국을 도보로만 다녔다는 것. 그는 하루에 250리를 걷는 준족으로 서울에서 진주까지 3일 만에 걸어 주파했다고 한다.

한편 독립운동가 안경신은 1920년 임신한 몸으로 광복군 총영 결사대에 참가하고, 평양 시내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그는 장덕진·박태열 등의 동지와 함께 1920년 5월 도보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8월 1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먼 길을 걷는 수고도 기꺼이 감수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두 다리에 의존하여 국내외를 걸어 다녔을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독립운동가에게도 잘 걷는다는 것은 중요한 임무였던 셈이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