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②

INPUT SUBJECT
    


글 박영규 작가


1920년대, 시대의 빛독립투사들 ②

  



1920년대 혼란의 일제강점기. 어디를 가도 어둠뿐이었던 조국의 현실에서 의지할단 하나의 빛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가슴에 품은 독립의 염원만큼은 누구하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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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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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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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사회장 장례식(한국은행 앞)



계몽운동의 주춧돌 이상재

1927년 4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사회장이 치러졌다. 월남 이상재의 장례식이었다. 이상재는 청년 시절엔 개화파 인물이었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887년 박정양이 내각에 돌아오면서 다시 관직에 몸담았다. 박정양이 미국 전권대사로 갈 적에는 2등서기관을 수행하였고, 귀국 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에서 활동했다. 이어 법부참사관과 학부아문 참의 등을 지냈다. 학부 참의 시절인 1894년에 신교육령을 반포하여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 신교육제도를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일이 발생하고 친일 정권이 힘을 잃자 이상재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서 탐관오리 척결에 앞장섰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설에 가담했다. 만민공동회의 의장과 사회를 맡아 조직을 이끌었는데, 이를 계기로 탄핵되어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이후 황국협회 등의 방해로 독립협회마저 해산되자 이상재는 다시 낙향을 선택했다.

1901년 이른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이상재는 아들 이승인과 함께 붙잡혀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이승만의 권유로 기독교를 접하고 개신교인이 되었다. 출옥 후에는 ‘초갓집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은 후 이상재는 광무황제(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참찬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2년 뒤인 1907년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일강제병합이 있은 후에도 일본은 이상재에게 작위와 관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하였고, 언론과 기독교단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당시 이상재는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라 할 수 있는 YMCA에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고, 1920년에는 해당 단체의 회장까지 맡으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상재는 주도적으로 민립대학 기성회 출범을 도모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사회운동을 지속했다. 1925년 4월 전국 기자대회 의장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927년에는 총체적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재는 서울의 전세방에서 병사했다. 네 명의 아들 중 막내 승준만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이상재보다 먼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특히 차남 승인은 개혁당 사건 당시 이상재와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이상재의 풍자와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일강제병합 후 이상재는 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등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상재가 말했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셔야 하겠습니다.”


느닷없는 말에 이완용과 박제순은 영문을 몰랐다. 그러자 이상재가 덧붙였다.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데 선수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일본으로 이사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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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남강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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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동상(193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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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에 설립된 오산학교 전경(1915, 남강문화재단 제공)



민족운동의 요람,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1907년 도산 안창호는 평양에서 민중의 자각을 일깨우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동을 받은 어느 사업가가 그해 11월 24일, 오산학교라는 중등교육기관을 세운다. 유기상점과 공장을 운영하는 갑부 이승훈이었다. 이승훈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1864년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0살에 아버지마저 잃으며 고아가 되었다. 이후 유기점의 사환으로 들어가 장사를 배웠다. 16살 때부터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떠돌면서 행상을 했다. 1887년 24살이 되던 해에 철산에 살던 오희순에게 돈을 빌려 유기공장을 세우고 유기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은 제법 번창하는 듯했으나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지속된 청일전쟁으로 공장과 상점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그는 다시 오희순에게 돈을 빌려 공장과 상점을 일으키고 사업을 확장했다. 어느새 이승훈의 사업 영역은 유기공장뿐 아니라 무역업과 운송업으로 확대되었고, 석유와 종이, 양약 등을 거래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덕분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군수사업에 돈을 댔다가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고 낙향했다.

몇 년간의 은둔 생활 후, 이승훈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과 평양에서 접한 안창호의 연설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한다.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교육운동이다. 이승훈은 한국 민중을 자각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교육기관인 강명의숙에 이어 중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오산학교에는 조만식, 윤기섭 등이 교사 또는 교장으로 재직하며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냈다. 또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평안북도 총관이 되었으며, 항일청년단체 청년학우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한일강제병합이 단행되었다. 1911년 황해도 신천 지방에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안악사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던 이승훈은 관련인물 160여 명과 함께 검거,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잇따라 발생한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가석방되었다.

이승훈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출옥한 뒤에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고, 기독교 장로가 되어 기독교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3·1운동 당시 이승훈은 기독교측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3·1운동 주모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2년 감옥에서 나온 이승훈은 이상재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만들고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앞장섰다. 조만식과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한편 자신의 마을인 용동을 중심으로 이상촌 건설의 계획을 세우고 ‘자면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자면회는 근면·청결·책임 등의 정신을 내세우며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를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용동 주변 7개 마을과 연계하여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결성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이 3·1운동으로 투옥될 당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으나, 1920년 9월 다시 문을 열어 200여 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승훈은 1925년 오산학교를 재단법인으로 인가받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이후로도 이승훈은 1930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골을 해부하여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할 수 있도록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달란 유언을 남겼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