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진
독립운동가 현천묵

북간도로 망명하여<BR />무장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진<BR />독립운동가 현천묵
    



글 학예실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진
독립운동가 현천묵



  

현천묵은 대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무장독립투쟁을견지하였으나, 그는 특출난 종교인도 군인도 아니었다.대신 그는 소통에 능한 리더였다. 종교로써 사람들을 아우르고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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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서다

현천묵은 1862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꾸준히 한문을 수학하였다. 학업에 대한 관심은교육으로 이어져 1906년부터 민족교육의 산실인 보성학교 학감과 교감을 맡는다. 현천묵은 학생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경성지회장으로 선출되며 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갔다.

대한협회 함경북도 경성지회는 의병을 지원하거나 군자금을 조달하며 항일전을 이끌었다. 계속된 일제의 탄압으로 1910년 전후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고, 현천묵은 대종교 수용을 통해 항일 의지를 되살리고자 하였다. 이후 포교활동과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찾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도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교육을 이어갔다.


북간도 무장독립투쟁을 이끌다

1919년 현천묵은 이주한인의 규합을 위해 중광단 조직에 힘을 보탰다. 더 조직적인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결국 총재 서일을 중심으로 대한정의단이 조직되었다. 현천묵은 50대 후반에 부총재를 맡아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후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1920년 10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전투에서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는데, 이에 책임을 통감한 총재 서일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일에 이어 현천묵이 북로군정서의 총재를 맡았다. 현천묵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직접 투쟁보다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섰다. 현천묵은1925년 신민부가 만들어지기까지 독립운동단체 통합에나섰고, 192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현천묵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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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협회회보』 제7호에 실린현천묵 관련 내용(19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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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성서 사관양성소 졸업식과 졸업증서 (1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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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에서 사용한 무기류(1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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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단체 통합에 관한신한민보 기사 (1923.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