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독립운동

INPUT SUBJECT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독립운동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리고일제는 이들의 한글운동에 ‘유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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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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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의 주역 최현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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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이윤재 선생




민족 말살에 맞서다 고초를 겪은 한글운동

1942년 10월 1일 이윤재·한징·최현배·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회원 11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함흥으로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어대사전』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편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발단은 사소했다. 7월 함흥 영생여학교 학생이 기차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었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조선인을 철저히 복종시키고자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겉으론 ‘황국신민(皇國臣民)’,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운운하며 우대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폭압이었다. 공공장소에서 조선말을 쓰는 일조차 문제 삼았고 어린 여학생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도 없었다.

여학생은 함흥 홍원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형사들은 불온사상을 점검한다며 그의 일기장까지 들추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사건을 키울 속셈이었다. 결국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였던 정태진이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수사의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정태진은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관여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심문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소굴’이며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기다렸다는 듯 조선어학회에 일제의 마수가 뻗었다. 사실 이것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된 기획 수사였다. 일제는 진즉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에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관계자·대종교 신자·신간회 회원·피압박민족대회 참가자 등 사상범으로 분류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다는 한글운동 또한 일제로선 눈엣가시였다. 민족정신을 말살해야 하는데 오히려 북돋우고 있었으니 말이다.1942년 10월에 불어 닥친 검거 열풍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도합 33명이 붙잡혔고, 48명이 조사를 받았다. 회원이고 후원자고 가리지 않았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에 내란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취조와 심문에 능한 악질 형사들이 투입되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 함흥 홍원경찰서는 신음과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1945년 10월 10일 자 『매일신보』는 그 고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두 팔을 묶어 천정 대들보에 매달았다. 형사 여럿이서 죽검으로 매타작을 했다. 동지끼리 맞세워 놓고 때리라고 강박하기도 했다. 콧구멍에 주전자를 대고 물을 붓는 등 야만적인 고문이 그칠 줄을 몰랐다. 선생들은 한참씩 까무러쳤다가 깨어나곤 했다.


경찰은 『조선어대사전』의 원고를 증거랍시고 들이밀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예컨대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을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로 풀이했는데 그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국 독립을 추구한 것이라는 식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모두 16명. 그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운명했다. 11명은 예심과 공판을 거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문에서 조선어학회와 한글운동에 대한 일제의 본심이 읽힌다.


‘이 운동은 민족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민족 문화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운동의 점진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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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보급을 위해 펴낸 교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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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조선말큰사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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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표준어 사정 제3독회를 마치고(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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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 간행된 『조선말큰사전』



조선어학회, 한글을 정리하고 통일하고 보급하다

구한말에 한글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주시경은 이 일이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도외시하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주시경은 경고했다. 최현배를 비롯한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했다. 조선어학회의 전신이 된 단체였다.

조선어연구회는 철자법을 연구하면서 동인지를 간행했다. 1926년에는 ‘가갸날’을 만들어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했으며 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꿔 불렀다. 그러나 연구 위주 활동으로는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음모를 저지하기 어려웠다. 언어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어연구회는 이극로 등의 활동가들이 합류하면서 1931년 ‘조선어학회’로 거듭났다. 조선어의 연구 및 통일, 보급을 위한 중추기관으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어학회가 야심 차게 추진한 첫 사업은 맞춤법 통일이었다. 그 무렵 한글 맞춤법은 쓰는 곳에 따라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대표하는 언어가 되고자 한다면 이것의 해결이 급선무였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해 3년에 걸쳐 125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통일안이 통과되었고, 곧이어 한글날에 반포됐다. 맞춤법 통일안은 ‘표준말을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표준말로 정한 뒤 띄어쓰기 등의 규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통일안은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으며 신문·잡지·단행본 등에 쓰이기 시작했다.

1936년 한글날에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1934년 사정위원회를 설치해 표준어와 표준철자를 검토하고 학교·언론사·문필가 등 500여 곳에 발송해 여론을 취합했다. 지역과 이념을 떠나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망라한 것이다.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도 나왔다. 국내는 물론 외국 음성학 연구단체의 자문까지 구하며 정성을 들인 결과였다.

조선어학회는 맞춤법·표준말·외래어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정리와 통일 작업을 완료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정비한 한글은 한국인의 삶 속에 있어야 했다.

회원들은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청년회·학교·종교단체 등의 외부강습회에서도 한글 강연을 했다. 노동야학과 농민학교의 한글 교육도 지원했다.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또한 한글운동 차원에서 함께 이뤄졌다. 조선어학회 내에 한글교정부를 설치해 교정을 요청한 사람들의 글을 새 기준에 맞게 고쳐주기도 했다.

한글 교재로는 후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의 『한글공부』(1931)가 사랑을 받았다. 기관지 『한글』에서도 한글 교재를 상세히 해설했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단계별 공통교과서도 계획했다. 계획의 실현을 위해 조선어학회 부설 출판사를 설립했지만 고질적인 경영난과 일제 탄압으로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36년 조선어학회는 한글통일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본격적인 사전 편찬에 나섰다. 먼저 1928년에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인수하고 1937년부터 어휘를 수집했다. 수십 명의 편찬위원이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전문용어는 학자들에게 의뢰하는 등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39년 초 어휘 풀이를 대부분 완료했다. 11년간 수집하고 풀이하며 서술해온 대사업이 드디어 종착역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40년 조선총독부에 16만 개의 어휘와 3천 장의 삽화로 이루어진 『조선어대사전』의 출판을 신청했다. 일부 삭제와 정정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어도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전 원고는 꼼꼼한 수정을 거쳐 1942년 출판사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이 중단되고 말았다. 피땀 어린 원고 또한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는 바람에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우리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다

역사가 박은식은 나라의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혼(魂)’과 물질적인 ‘백(魄)’으로 나누고, 혼이 멸하지 않으면 백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식민지의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박은식이 말한 ‘혼’을 국학, 그중에서도 한글운동이 일깨웠다.

독립이란 겉으로는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일이지만 그 속은 민족문화 수호의 양상을 띤다. 국권을 회복해도 고유의 말글을 상실하면 사실상 독립으로 보기 어려웠다. 일본어가 ‘국어’였던 일제강점기. 강점이 길어질수록 조선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린 세대가 한글사용의 기회를 잃을수록 민족의식이 옅어지는 건 불가피했다. 나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는 청년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독립지사들이 조선어학회로 모여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글을 바로 세워야 민족정신이 살아나고 독립의지가 솟구치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가 온갖 악조건과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한글운동을 펼쳐나간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운동은 독립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단지 민족문화를 고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어학회는 고유의 말을 계승하면서도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창조적으로 발전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표준말 사정안·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은 해방 후 한국사회의 미래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10월, 사라진 『조선어대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57년까지 『큰사전』 여섯 권을 간행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말 대사전 편찬이라는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그 지난한 역사가 알알이 맺혀 있는 사전의 머리말은 언제 읽어도 뭉클하다.


‘조선말은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