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여성 독립운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여성 독립운동가로<BR />살아간다는 것

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교수

 

여성 독립운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이혜련은 미주의 대표적 여성독립운동가다. 그녀의 본관은안성(安城)으로, 안혜련·헬렌 안(Helen Ahn)·이헬렌 등의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안창호의 활발했던 독립운동배경에는 열렬한 지지와 숭고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아내이자 동지, 이혜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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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련 가족사진(1925~1926년경)

 

도산 안창호와의 결혼과 미국 이주

이혜련은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의 장녀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정교육에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인물이었다. 1897년, 13세의 이혜련은 안창호를 만나약혼했다. 2년 후인 15세에는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근대교육을 받았으며 17세에 졸업했다. 1902년, 서울제중원에서 마침내 안창호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주례는 선교사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가맡았다.

밀러는 1866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피츠버그대학(1889)과 유니언 신학교(1892)를 졸업한 인물인데, 1892년에 부인 안나 밀러(Anna Reinecke)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2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로 활동하며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1901년 다시구세학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 시기안창호는 구세학당에 입학해서 밀러로부터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1902년 이혜련은 남편 안창호와 함께 당시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던 미국으로 갔다. 그녀는 주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면서 가사를 도맡고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학교인자혜사업(慈惠事業)에 통학했다.1907년 1월경 안창호가 국사를 위해 환국하기로 했을 때 23세의 이혜련은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를아끼지 않았다. 안창호가 미주를떠나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그녀는 백인 집을 청소하고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해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또한 장남 안필립과 함께과일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여성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혜련은 좌절하지 않고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돕는 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먼저 1919년 3·1운동 이후, 3월 2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 조직에 가담하였다. 부인친애회에는 이혜련을 비롯해 임메불·박순애·김혜원 등이 주요 인사들로 있었다. 조직의 목적은 한인 여성들의 생활 개선을 통한 독립운동 지원. 그리하여 절대로 일제의 상품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절약된 돈은 독립자금에 보태기로 했다.

1919년 8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직된 미국한인 여성들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이결성되었다. 부인친애회는 대한여자애국단의 로스앤젤레스 지부로 활동했다. 이혜련은 지부의 재무를담당하며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단원들은 물론한인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로 모금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의연금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져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밑거름이 되었다.한편 이혜련은 김마리아가 로스앤젤레스로 갔을 당시, 교포 지도자들과 함께 그녀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직후안창호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수감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결국 그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에 이혜련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비탄과 슬픔을 잊고자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4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단 위원을 맡았으며, 재미 한인전후구제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한 대업에 동참하는 여장부의 면모를 보였다.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이혜련

1946년 1월 6일,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쿠바에 있는 한인들이 노동금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을 호소하며 구제를요청해왔다. 이때 대한여자애국단은 지부별 구제금모금에 나섰고, 총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혜련은 피난민을 돕기 위해적십자와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했다. 이들은 고국으로 옷가지·약품·담요 등의 구호물품을 보냈다.1962년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43주년 기념일을 맞아 그 공로를 인정받으며 기념품을 증정받았다.

1969년 4월 21일, 이혜련은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973년 11월 10일, 도산 95회 탄신 및 흥사단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사망한 이혜련의 유해를 서울 도산공원으로 모셔와 이장했다.

이혜련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여성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곁에는이혜련이 있었고, 여성독립운동조직 중심에도 이혜련은 있었다. 2008년 정부에서는 이러한 이혜련의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