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리
경술국치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리<BR />경술국치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리

경술국치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망국의 아픔이 배어있는 ‘경술국치’다. 자결과 독립전쟁, 그리고 매국.일제의 강제병탄이 빚은 그들의엇갈린 선택을 만나보자.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하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려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해야 한다고 확신하여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의하고 일본국황제 폐하는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한국 황제 폐하는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대한제국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참석을 강요당한 융희황제도 마지못해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내각 대신들은나라를 일제에 병합한다는 안건을 상정해 의결했고, 이완용은 그날부로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 8개 조항으로이뤄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의 양여를 수락하고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중략)…제8조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거친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렇게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사전에 조율한 결과였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조성하고 대신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약이라이름 붙기는 했지만 사실상 강제병탄이었다.조약은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을 우려해 공식 선포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회단체에 족쇄를 채웠다. 이미 낌새를 알아챈 원로대신들도구금당했다. 마침내 8월 29일, 병합 포고가 나붙었다.나라가 망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이란뜻이었다. 대한제국을 포함해 518년간 지속해온 조선은역사상 유례없는 국권피탈(國權被奪)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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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거부가 된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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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탄조약 체결을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는 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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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병탄조약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경술국치가 당장 거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일제가 강제병탄을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저항세력을철저히 짓밟은 탓이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인 한반도 병탄에 착수한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을 거쳐 한국은 외교·사법·국방 등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망국의 서글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1909년이 되자 일본은 강제병탄에 앞서 노골적인 폭압에 나섰다. 먼저‘남한대토벌작전’으로 조선 항일 의병의 씨를 말리고자했다. 목을 베고 총살하는 것도 모자라 유해를 가마솥에넣어 삶기도 했다. 처참하고 잔혹한 살육이 이뤄졌다. 그해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2월에는 이재명이 총리대신 이완용을 습격해 중상을 입히면서 강제병탄 음모는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빌미로안창호 등 신민회 인사들을 잡아들이고 애국계몽운동에대한 감시를 강화함으로써 일찍이 저항의 싹을 잘라냈다.

1910년 5월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신임 통감에 부임하면서 폭압은 극으로 치달았다. 통감부는 「황성신문」·「대한신문」·「대한매일신보」 등에 대해 발행정지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또 1만 명이 넘는 헌병과경찰을 각지에 배치하고 일본군 2개 사단으로 무력을 과시했다. 강도가 입을 틀어막고 총칼을 들이댄 격이었다.

공포 분위기가 무르익자 데라우치 통감은 일본에서 짜온시나리오대로 ‘한일병합조약’을 비밀리에 관철했다. 강제병탄을 포고한 8월 29일. 일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열었다. 거리에 아치를 세우고 오색등을 달았으며 집마다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들을 앞장세워 덕수궁 등지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대다수 한국인들은 경술국치에 망연자실했다. 기우는 국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설마 하던 일이그예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일은 내 평생에 처음이었을뿐더러 한민족의 역사를 보자면 몇 천 년에 한 번도 있기드문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경우에 응하는 감정의 길을가진 적이 없었다. 단지 눈앞이 캄캄하고 전신에 맥이 풀릴 뿐이었다.”

 

이 무렵 청년기에 접어든 소설가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이렇게 고백한다. 민족적 울분이 차올랐으나 하루아침에망국의 국민이 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통곡하고 자결하는 이도 있었고, 누군가는 제 몸과 마음을 던져 앞길을 열어나갔다.시인 황현은 경술국치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개화기 풍경을 지식인의 눈으로 서술한 황현의 저작 『매천야록』도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의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재야의 유생이었지만 나름대로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일본이 힘으로 나라를 빼앗았으니 나라를 되찾으려면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중국과 러시아로 향했고, 더러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기도 했다.

1910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는 국권회복의 최고전략으로 ‘독립전쟁’을 선택한다. 국외에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임무를 맡고 망명길에 오른 안창호는 조국을 떠나면서 ‘거국가(去國歌)’라는 노래를 남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중략)…

부디부디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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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를 맞아 지식인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택한 매천 황현 선생

 

나라를 판 대가와 나라 잃은 고통

한편 친일파는 나라를 판 대가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한국인으로서 강제병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는 을사5적·정미7적·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이완용은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을 도운 공으로 은사금(恩賜金) 15만 원(현재 가치 30억 원)을 하사받았다. 1907년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맺을 때도 10만 원(현재 가치 20억 원)을 수령한 바 있으니, 나라를 팔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챙긴 셈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매수공작금을 풀었다고 한다. 이완용의 몫이 적었을 리 없었다.거금을 손에 넣은 그는 부안·김제·군산 일대의 비옥한 논밭을 사들였다. 일제강점기 초 이완용이 가지고 있는 땅의 면적만 해도 여의도 2배 크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 시세에 따라 토지를 팔아 나갔는데 덕분에 이완용은 1920년대 중반 경성 최대의 현금 부자로 떠올랐다. 세간에선 그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의 액수가 300만 원이나 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당시 300만 원이란 현재 가치 6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이뿐만이 아니다. 일제는 강제병탄 이후 대한제국 고관대작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었다.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비롯한 76명이 후작·백작·자작·남작에 임명되었다. 이는 친일 행위에 대한 논공행상의 의미도 있었지만 명사들을 회유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대부분 일본을 등에 업고 귀족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개중에는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도 있었다.귀족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다. 친일파 귀족들은 막대한 특혜 속에서 부를 쌓아갔다. 예컨대 국유 미개간지나 임야를 거의 무상으로 불하받았는데, 그 땅을 제삼자에게 매각해 차익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뇌물로 받은 돈도 제법 쏠쏠했다. 그들은 일제가 비춘 한 줄기 빛에 매달려 호의호식했다.이에 반해 국권 피탈의 그림자는 민초들의 삶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자마자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지주가 신고한 소유권만을 인정하고 소작농의 관습적인 권리들은 박탈했다.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의 운명에 놓였다. 그들의 고달픈 발길은 국경 너머 간도로, 이역만리 시베리아로 이어졌다.일제는 자칭 ‘합법적으로’ 강탈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거나 일본인에게 헐값에 팔았다. 토지뿐 아니라 산림·광산·어장 등 돈 되는 것엔 어김없이 일제의 손길이 뻗쳤다. 서민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잡다한 세금에 눌려 신음했고, 민족자본은 쏟아지는 일본 상품에 파묻혀 매장됐다. 피압박민의 억울한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토로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까지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거리에 깔린 헌병과 경찰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색출했다. ‘말 안 듣는 조선 사람’은 무조건 잡아들여 거꾸로 매달고, 채찍질하고, 인두로 지지고, 손발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악형을 가했다. 감방에서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서더라도 종신 불구가 되었다.“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과 압제를 받아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강도 손안의 사용품이 되고 말았다.”신채호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처지를 비통하게 읊조렸다. 동시에 참혹한 현실이 새 시대를 부르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신채호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은 바로 그 치욕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조선 혁명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의열투쟁과 독립전쟁은 고통에 빠진 한국인에게 굽이치는 광복의 여정을 제시했다. 망국의 설움과 치욕은 지난 역사를 성찰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출발점이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곧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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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병탄과 함께 전국적으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