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다시 시작된 외침
대한독립만세

다시 시작된 외침<BR />대한독립만세

글 박영규

 

다시 시작된 외침

대한독립만세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융희황제가 사망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면서억지로 황제 자리에 올랐던 그였다. 망국의 황제로서 치욕과 굴종의 세월을 살다 끝내 53세로 눈을 감았다. 융희황제가 생을 마감했던 1926년, 한국에는 다시금 만세운동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피어난 독립의 열망, 6·10만세운동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1926년, 이 여파는 한국에까지 미쳤다. 독립 세력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었고, 무장독립운동도 청산리대첩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또한 임시정부 내에서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해졌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문화정책이라는 복병에 밀려 자리를 잃어갔다.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분열을 극복하고 항일전선을 통일하여 민족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28일, 송학선의거가 발생한다. 송학선은 스스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되길 갈망하며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융희황제 서거 후 사이토가 조문할 때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고 4월 28일에 창덕궁과 이어지는 금호문으로 갔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각, 송학선은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차에 탄 인물이 사이토 총독이라는 판단 아래 송학선은 곧바로 차에 뛰어올라 그들을 칼로 찔렀다. 하지만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사이토 총독이 아닌 경성부회 평의원 다카야마와 사토, 이케다 등이었다. 비록 송학선은 사이토 총독 암살에 실패했지만, 송학선 의거는 한국인들에게 항일운동에 대한 투쟁 의지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시위운동을 먼저 기획한 쪽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조선공산당 상하이부는 융희황제가 사망하기 전에 대중시위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그해 5월 1일 노동절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러다 계획을 수정하여 3·1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들은 천도교 세력과 민족주의자·학생·청년을 총망라해 ‘대한독립당’이라는 중립적 개념의 단체를 결성했다. 대한독립당은 융희황제의 인산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총독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미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3·1운동이라는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던 터라 총독부와 일본경찰, 그리고 헌병대는 천도교와 공산당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에게 먼저 꼬리가 잡힌 쪽은 공산당 세력이었다. 6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격문과 자금을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지 않았고, 결국 기다리고 있던 박래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의 합동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학생 조직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덕분에 각 지역으로 격문을 운송하는 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10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약 5~6백 명의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2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전북 고창보통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인천 만국공원에서는 수십 명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학생 시위는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 한계를 안타깝게 여긴 또 다른 학생 조직이 다시 만세운동 계획을 세운다. 배재고보생 문창모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격문을 인쇄하는 중에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문창모와 핵심 인물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결국 6·10만세운동은 총독부와 일본경찰, 헌병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시 사상에 관계없이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결합체로서 훗날 ‘신간회’ 결성이라는 결실을 얻게 된다.

 

alt
돈화문을 지나고 있는 광무황제 국장 행렬
alt

금호문(1926.04.)

alt

송학선 의사 사형 순국 보도(「동아일보」, 1927.05.22.)

 

광주학생운동, 그 당찬 움직임의 시작

11월 3일. 이날은 단군이 조선을 처음 세운 개전철이다. 그리고 일본에게 11월 3일은 4대절 중 하나인 명치절이었다. 묘한 우연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전국적으로 명치절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신사참배가 이어졌다. 이때 광주의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광주학생운동의 서막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광주에서는 한국 학생들의 시위가 종종 벌어지곤 했다. 11월 3일 시작된 학생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10월 30일, 그러니까 닷새 전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5시 30분경,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충돌을 야기한 쪽은 일본인 중학생들. 그들은 나주역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학생인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에 격분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일본인 중학생들과 싸움을 벌였다. 박준채는 광주고보 2학년생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찰이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박준채를 구타하고, 지켜보던 한국인 학생 십여 명이 가세하면서 싸움이 커졌다. 이날 싸움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나 문제는 이틀 뒤인 11월 1일 일본인 중학생 네댓 명이 광주고보에 도전장을 던지면서부터 시작됐다.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보 학생 간의 싸움은 한층 거세졌다. 양쪽 학교 교사들이 중재를 위해 나섰으나 이들 또한 점차 갈등 양상을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교사와 경찰이 통학 열차에 동행했다. 전남 도지사까지 나서서 양쪽 학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을 엄격하게 감독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의 오만하고 차별적인 행동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 조직적인 저항을 결심한 상태였다.

11월 3일 오전 11시경에 광주우편국 앞에서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중학생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 학생 최쌍현이 단도에 찔려 안면 부상을 입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본인 중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였고, 광주중학생 백여 명 또한 유도교사의 인솔 아래 목도와 단도를 들고 싸움판에 가세했다. 이에 광주고보는 물론이고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까지 몰려와 대대적인 싸움판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양쪽 모두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더 이상 차별과 모욕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집회를 통해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한다. 가두시위에 참여한 학생 수는 3백여 명. 경찰의 진압에 대비해 목봉이나 목검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다수는 독서회 회원들이었다. 광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1926년 결성된 ‘성진회’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게 조직이 발각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성진회를 해체하고 대신 학교마다 독서회를 만들어 비밀결사의 성격을 유지했다. 1928년에는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등의 동맹휴업을 이끌기도 했다.

가두시위에 나선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를 누볐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이미 소방대·경찰·재향군인들이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던 탓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여고보 학생들까지 합세했다. 광주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학생들을 지지하며 박수를 보냈다. 경찰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학교 강당에 집결하여 이후의 행동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alt
광주학생의거 격문
alt
광주학생의거 당시 학생들 검문검색(1929)

 

전국에 울려 퍼진 청년의 만세 소리

시위 과정에서 광주고보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명이 구속되었다. 전라남도 당국은 우선 3일간의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시위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 의지는 꺼질 줄을 몰랐다. 광주 청년 조직까지 가세하며 투쟁은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전개되어갔다. 단순히 학생들만의 항일투쟁을 넘어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12일에 재차 가두시위에 나서며 광주여고보와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지만, 이미 두 학교 학생들은 감금된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광주농업학교 학생 중 백여 명 정도가 학교를 뚫고 나와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학생들의 맹렬한 저항이 이어지는 동안 경찰은 선두에 있는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여 체포한 뒤 모두 구속해 버렸다. 체포된 학생은 광주고보 19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60여 명을 포함해 총 250여 명이었다. 또한 광주고보 학생 300여 명과 광주여고보 학생 17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당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무기정학 조치의 부당함을 항의하며 동맹휴교를 결정했고, 이에 학교 당국은 무기정학생을 64명으로 늘렸다. 광주사범학교에서도 학생 38명에게 퇴학이 내려졌다.

학생들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주고보 170여 명이 광주형무소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55명이 구속되었다. 1930년 1월 9일, 학생들은 2학기 시험에 백지동맹으로 항거했고, 이 일로 17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백지동맹이 계속되자 학교 당국은 다시 48명의 학생을 퇴학시켰다. 이후로도 퇴학 사태는 계속 이어졌고 광주여고보에서도 백지동맹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명이 퇴학당했다.

서울의 학생 시위는 12월 2일과 3일 양일간에 걸쳐 격문이 유포된 후, 12월 5일부터 본격화되었다. 5일에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 시내 대다수의 학교가 가두시위에 가담했는데, 1월 15일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가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경찰 7백여 명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고, 개성·대전·부산·진주·평양·신의주·함흥 등 국내는 물론 중국 간도에서도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194개교에 이르렀으며, 참여 학생은 5만4천여 명, 이로 인한 퇴학 처분자가 582명, 무기정학이 2,330명, 경찰에 연행된 학생이 1,642명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한 학생만세운동은 비록 그 주체가 학생들로 국한되기는 하였으나 3·1운동 이후 10년 만에 전개된 대대적인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또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alt

광주학생의거 당시 연행되는 학생들(1930)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