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
대종교 지도자 김교헌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BR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BR />대종교 지도자 김교헌

글 학예실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

대종교 지도자 김교헌

 


김교헌은 민족사학 권위자이자 대종교 2대 교주로 활동하며우리 민족의 기틀을 바로잡고 무장투쟁의 영웅들을 지도했다.묵묵히 제 길을 걸어온 애국자요, 참된 조선사람이었다는당대의 평가처럼 김교헌은 오로지 민족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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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사관을 정립하다

김교헌은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다. 이는 김교헌의 항일의식이 더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4년에는 대종교의 역사적 연원을 연구한『신단실기(神檀實記)』와 단군민족 역사서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김교헌은 단군과 대종교의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종교 제2대 교주로 활약하며 무장투쟁을 이끌다

1916년 김교헌은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하였다. 이후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또한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김교헌은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북로군정서의 결성과 활동을 지도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무차별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대종교의 독립운동 기반이 약화되었다. 김교헌은 본부를 영안현(永安縣)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하였으나, 1923년 11월 18일 병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교헌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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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입교 이후의 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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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1919.02.)

만주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불림)로,

무장혈전을 통한 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독립선언서이다.김교헌이 첫 번째로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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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만주 영고탑에서 14회 중광절 기념(1922)

중광절은 대종교의 사대경절 중 하나로 나철의 대종교 조직을기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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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에 실린 김교헌

별세 기사(1924.01.19.)

김교헌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