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세계사

피의 일요일과 제1차 러시아 혁명

피의 일요일과 제1차 러시아 혁명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피의 일요일과

제1차 러시아 혁명

 


러시아 문학계에 톨스토이가 있고 음악계에 쇼스타코비치가 있다면 미술계에는 일리야 레핀(1844~1930, Iiya Yefimovich Repin)이 있었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처럼, 일리야 레핀은 자신이 목도한 러시아의 모순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그림엔 단순한 사실 이상의 ‘현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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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1870~1873,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 한 장의 그림은 왜 충격적인가?

1873년 일리야 레핀은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한다. 훗날 레핀의 상징과도 같아진 <불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그가 20대 후반에 여행을 하다가 직접 목격한 광경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그림은 초췌한 얼굴을 한 11명의 인부들이 힘겹게 배를 끌어 뭍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19세기 후반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육지에 인접한 바다나 강에서 배를 이동시킬 때 사람들의 머리와 배에 끈을 묶고 배를 끌어 운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인간착취에 가까운 방법은 증기선이 발명된 뒤에도 오랫동안 이용되다 20세기 초반에 가서야 중지되었다.

레핀은 러시아 민중들의 사실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아 차르(Tsar, 최고 통치자, 황제)가 다스리던 제정 러시아의 열악한 실상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장치가 바로 큰 배 뒤로 보이는 연기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배의 뒤쪽으로 희미한 연기가 것이 피어오르고 있는데, 이것은 증기선이 내뿜는 증기다. 즉, 증기선이 개발되어 운항되던 시대에도 제정 러시아는 가난한 인부들에게 혹독한 육체노동을 강요하며 배를 끌게 했던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몸으로 큰 배를 끄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노들과 노동자들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러시아 역사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는 개혁과 반동개혁이 반복해 일어나던 시기였다. 개혁정책과 반동개혁정책으로 인해 1905년과 1917년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차르(황제)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실업자의 증가와 함께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고생하던 농노 및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에 더해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벌인 제국주의 싸움,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많은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으로 비화됐다.19세기 말 국가 주도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에서도 노동계급이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고 탄광과 유전을 개발하는 등 의욕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데 힘입어 노동자계급의 수는 20세기 초반 약 3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증가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시작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농노는 물론 노동자들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매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농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갔고, 불만은 결국 러시아를 다스리는 차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전제정치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개혁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20세기 초반 예기치 않게 혁명이 발생한다. 역사는 이를 ‘제1차 러시아 혁명’ 혹은 ‘1905년 혁명’이라고 불렀는데, 불을 당긴 것은 러일전쟁의 패배 분위기에서 터졌던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22일)’이었다. 오랜 시간 중노동과 열악한 임금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페테르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것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제였다. 시위대는 차르의 초상화를 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황제가 있는 왕궁(겨울궁전이라 불린)으로 향했다. 왕궁 경비병들의 발포로 시위 첫날에만 3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궁 경비대의 무자비한 발포는 19세기 중반 이래 차르 정부의 반동개혁정치의 여파로 누적된 문제들과 연속적인 전쟁 패배(크림전쟁과 러일전쟁 등)로 고조되어있던 러시아인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어 전국의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농노들의 폭동, 소수민족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페테르그라드에서 시작된 시위가 경비대의 무자비한 발포 이후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퍼지며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했다.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가 국민의 기본권 인정,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창설 등을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지만, 노동자들과 농노들의 투쟁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 시위대의 수는 모스크바에서만 무려 5만 명을 넘어섰다.

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를 위기로 몰고 갔던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차르의 군대가 효과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고, 혁명세력들의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같은 해 12월 19일 종언을 고한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다음 해인 1906년 5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 의회인 ‘두마(Duma)’의 창설을 이끌어냈다.

 


고종환

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