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추억

건빵 한 봉지의
기억과 위로

건빵 한 봉지의<BR />기억과 위로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건빵 한 봉지의

기억과 위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비록 군대를 다녀오지않았더라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빵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군 간식이자 국민 간식으로 사랑받았던 건빵언제부터 우리가 건빵을 먹었는지 시간을 더듬어가다 보면 민족의 아픈 수난사가 자리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 역사의 산물

군대에서 먹는 간식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건빵의 역사는우리 국군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된 뿌리를 지닌다.

한국전쟁 무렵만 해도 국군은 건빵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한국전쟁이 난 후 국군에게 건빵이 지급됐지만,양이 부족했고 품질 또한 좋지 않았다.”-중앙일보, 2010.11.19.

 

이종찬 장군의 육군참모총장 재임 기간은 1951년 6월 23일부터 1952년 7월 2일까지로,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가장 치열했을 시기에 남한에서는 건빵도 제대로 생산할수 없는 실정이었다. 전쟁 중이라서가 아니라 그 무렵 우리나라에는 건빵을 생산할 기술이 없었다.

애당초 건빵은 일본 음식이었다. 침략전쟁을 위해 서양의비스킷을 본 따 만든 전투식량이 바로 건빵이었다. 일본 내전과 러일전쟁, 청일전쟁, 그리고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건빵이 완성됐다.

우리나라에 건빵이 처음 들어온 시기도 일제강점기다.1930년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건빵이 지급됐다는 기록이있다. 조선에서 건빵을 만들어 군에 납품한 뒤 남은 물량은전시물자로 비축해뒀는데, 광복 직후 경기도에 일제가 남겨둔 건빵만 해도 1,600가마니나 되었다고 한다.

건빵이 언제부터 국군에 지급됐는지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서 드러나듯 초기 국군은 건빵마저 넉넉하게 받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일제가 남긴 비축물량에 더해 소량 생산된 건빵이 전부였기때문이다. 대단한 요리도 아니고 고작 건빵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산업과 마찬가지로 제과제빵 공장 역시 주요 기술직은 일본인이 담당하였으니,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간 자리에는 빈공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건빵으로 보는 민족의 고난 극복사

그래서일까? 그즈음 건빵은 제법 귀한 대접을 받았다. 1953년 경향신문에는 삼군합동 위령제에 참석한 2사단장이 장병들로부터 각출한 돈과 건빵을 전사자 유가족에게 여비로나누어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1954년 동아일보에도 상이용사에게 건빵을 위문품으로 지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군대안에서도 없어서 먹지 못 하는 건빵이었지만 그조차 아끼고아껴 다친 전우와 전사한 전우의 유가족들에게 위문품으로전달한 것이다.

건빵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후반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건빵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함창희가 동립산업을 설립,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를 받아 대구에서 건빵을 만들었다. 수복 후에는 영등포에 더 큰 공장을 짓고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립산업은 일제가 남긴 적산인 모리나가 제과 건빵 공장을불하받아 건빵과 설탕 등 식료품을 생산했는데, 1950년대후반에는 전군에 군용 건빵을 독점 납품하기도 했다. 1956년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든 ‘우리의 공업’이라는 공보 영상에는 국군장병의 야전 양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건빵을 연간 6,200만 봉지나 생산한다면서 당시 주요 공업 생산품목으로 홍보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일본의 건빵이 침략전쟁을 목표로 한 제국주의가 만들어낸결과물이라면 우리에게 건빵은 시련과 고난 극복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 직후 남겨진 유가족의 쓰라린 마음마저 끌어안았다. 저마다 건빵에추억 하나씩을 새겨 넣듯, 우리 민족사에서도 건빵에 대한기억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폐허와 백지의 상태에서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저력이 녹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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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