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광복의 순간, 태극기 휘날리며

광복의 순간, 태극기 휘날리며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광복의 순간, 태극기 휘날리며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일왕의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조건 항복.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단 말에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복의순간, 그들의 손에서 나부끼는 태극기는 태극의 모양도4괘의 위치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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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앞 풍경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오?

사실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한 날은 광복 당일이 아니라 하루 뒤인 8월 16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가 있는 집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사람들은 히로히토 일왕의 방송이 있은 지 하루가 지나서야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광복의 기쁨과 함께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태극기의 모양이 서로 달랐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오?”

 

당시 사람들은 태극기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도 광복을 보도하며 노인을 찾아가 태극기의 모양을 물을 정도였다. 1942년 임시정부에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하며 이름을 ‘태극기’로 확정하고 모양 또한 통일시켰지만,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지금과 같은 모양의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채택한 것은 1949년 3월 25일,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시정위원회’에서였다.

그래서 광복의 순간, 거리를 수놓은 태극기 물결은 각양각색으로 빛났다. 일장기 위에 먹물로 태극무늬와 4괘또는 8괘를 그려 넣은 태극기·물감이 없어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흰색 무명천에 밥그릇을 엎어 놓고 그린 태극기·이불 홑청을 떼어내어 만든 태극기까지. 그런가 하면3·1운동 때 사용한 태극기를 고이 간직했다가 들고나온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태극기를 들고 있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국기는 달라도 조국에 대한 마음은 같았을 터. 모두 자신만의 태극기를 손에 쥐고 광복의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태극기가 있어야 할 자리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이승호는 일본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총독부 건물에서 정문을 바라보았다. 정문에는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일장기를 떼어내고 태극기를 걸어야겠다.’

 

하지만 이승호 역시 태극기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하였다. 번뜩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이 생각났다. 독립문은조선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세운 것으로, 건물 꼭대기엔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승호는 독립문으로 달려가 종이에 태극기의 모양을 그대로 베꼈다. 총독부로 돌아와 한국인 동료 전예용·손정준·최반 등과 함께 커다란광목에 그 모양을 옮겨 그렸다. 그리고는 총독부 정문 앞에 자신들이 만든 태극기를 걸어두었는데, 이것이 바로해방 후 서울에 최초로 내걸린 태극기다.

하지만 그들의 태극기는 금방 내려졌다. 8월 광복 후, 9월이 지나도록 일본인들이 총독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 총독부 정문에는 여전히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

1945년 9월 9일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4시에 조선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는 조선 총독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조선 총독은 하지중장과 미군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부 건물 앞의 일장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태극기가아닌 미국의 성조기였다. 미군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나서야 태극기는 당당히 제 자리에서 펄럭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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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는 순간(1945.09.09.)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