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그 여름,평화의 바람이 분다

그 여름,평화의 바람이 분다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그 여름, 평화의 바람이 분다

-경기도 김포-

 


여름이다. 눈이 부시도록 뜨거운 햇빛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새벽 내내 저물지 않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계절. 무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바람 한 점이 그리워 김포로 갔다. 북녘땅과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는 김포에는 요즘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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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가 살아있는 장릉 숲속길

 

 

도심 속 자연이 숨 쉬는 곳, 김포

김포 여행은 장릉에서 시작한다. 장릉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부모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1970년 사적 제202호로 지정됐다. 매표소 옆의 역사문화관에 먼저 들른 다음 본격적인 탐방길에 나섰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은 모두 40기로 이 중 31기(12개소)가 경기도에 있다.

장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인데, 능을 기준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 왕은 오른쪽에 왕비는 왼쪽에 안치한다)에 따라 배치됐다. 능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이 왕릉, 오른쪽이 왕비의 능인 것이다. 장릉이 있는 숲은 자연 생태가 고스란히 살아있어 연신 맑은 공기를 내뿜는다. 도심의 허파라 부름이 어색하지 않다. 때때로 산책로엔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과 수리부엉이(천연기념물 제324-2호)가 날아들고 소나무, 졸참나무 등 수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장릉 재실 앞에 있는 저수지는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는 자연학습장이다. 푸른 장릉산과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함은 물론 장릉산을 한 바퀴 돌아보는 800m 둘레길에는 전통 정자와 벤치·운동기구·전망대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아련한 학창시절의 기억

임진강을 옆에 둔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조용한 마을 한편에 교육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관리하는 김동선 관장과 이인숙 관장은 부부로 두 사람 모두 30여 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박물관에는 부부가 어린 제자들과 함께 만든 추억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교육 용구들과 학용품도 있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아이들은 신선한 체험을, 어른들은 아련한 추억을 안는다.

김동선 관장은 1996년 아내를 위해 교육박물관을 설립했다. 이인숙 관장이 교사로 재직 중에 사고로 시력을 잃으면서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동선 관장은 아내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수년간의 교육 자료를 모아 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작은 박물관은 교사로서 살아온 그의 총체이자 부부의 진심이었다.

인성교육관·교육사료관·농경문화관으로 나뉜 박물관 안에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일제강점기의 풍금·색이 바랜 교과서·옛날 농기구·병아리 우리·앉은뱅이책상 까지.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박물관 한 구석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김포를 뒤흔든 그 날의 대포소리

교육박물관에서 1분 거리에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이 있다. 진(鎭)은 우리말로 군사기지란 뜻이다. 조선시대에 덕포진과 임진강 건너 강화도는 유독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조선군은 이곳에서 두 차례의 승리를 거뒀다. 물론 패배의 기록도 남아 있다. 선조는 덕포진 앞바다를 따라 피란을 갔고, 프랑스 해군은 덕포진에 진을 치고 조선군을 공격했다. 1871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주민들에 의해 불에 타버린 사건도 있었다. 이는 신미양요의 빌미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초지진을 점령했다.

오늘날, 몇 개의 초 진지(陣地)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을 증명하고 있다. 바닷가 언덕에는 전투가 한창일 당시 무섭게 불을 뿜어댔을 포대(砲臺)의 흔적이 있다. 12개의 포대는 임진강과 강화도를 날카롭게 주시하는 모양새인데, 여기엔 바닷길로 침입해 오는 적을 포로 쏘아 바다에서 섬멸하겠다는 우리 군의 전략이 숨어 있다. 포병을 지휘하고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실어 날랐던 파수청도 비록 터뿐이지만, 남아있다. 1980년 덕포진을 발굴 조사하면서 덩달아 발견되었다고 한다. 포와 포탄·주춧돌·화덕 자리·상평통보 등 귀중한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었다.

덕포진 바로 위에는 바다로 돌출된 지형의 손돌목(孫乭項)이 있다. 이곳은 옛날 인천 앞바다에서 서울 마포나루까지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으로 ‘손돌’이란 사람에게서 그 이름을 따와 지었다. 손돌은 고려시대 인물로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당시 고종의 피난길에 동행했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험한 뱃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손돌의 목을 베려하자 그는 살려달라는 애원 대신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웠다.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왕는 손돌의 장사를 후하게 치러준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한 넋을 위로했다. 덕포진 끝머리에 손돌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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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바라보고 있는 덕포진 포대

 

공원과 산, 전망대에서 만끽하는 힐링

덕포진에서 강화 쪽으로 가다 보면 김포국제조각공원과애기봉을 알리는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문수산 기슭의 김포국제조각공원에는 국내외 저명작가 30인의 조각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목이 우거진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노라면 절로 사색에 빠져든다.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조각공원 끝머리 팔각정에 오르면 김포평야와 한강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공원 내 물썰매장과 야외수영장이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조각공원에서 나와 애기봉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서북부휴전선 일대엔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그중 애기봉은 북한의 개풍군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있는 유일한 전망대다. 애기봉이란 이름에도 절절한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가 산봉우리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기생 ‘애기’는 죽은 평양감사를 그리워하다 죽었는데, 이곳에 그녀의 넋이 서려 있어 애기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어디 조선시대뿐이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이곳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머잖아 전쟁의 아픔을 위로하듯 평화생태공원으로 재탄생 했다. 입구까지만 출입이 허용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애기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금세 마음이 녹아내린다. 북녘땅을 휘돌아 나오는 임진강,그리고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가르는 염하강이 한강 하구(조강)로 내리닫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문수산은 김포에서 가장 높은 명산으로 사철 경치가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이라 불린다. 조망도 탁월해 한강과 삼각산은 물론 서쪽 먼 곳 인천 앞바다가 가물거린다. 맑은날에는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산행 기점은 문수산 삼림욕장이다. 오밀조밀 이어진 완만한 산길은염하강과 한강 하구, 그리고 북녘땅을 바라보며 정상으로 뻗어 있다. 해가 이우는 저녁 무렵에는 염하강으로 스러지는 낙조를 덤으로 즐길 수도 있다. 문수산 자락에는1694년에 만들어진 문수산성(사전 제139호)이 있다. 문수산성은 강화 갑곶진과 함께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위해 쌓은 성으로 ‘문수사’라는 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축성 당시 북문과 서문, 남문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병인36양요 때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현재는 북문과 남문을복원하고 성곽도 새롭게 단장하여 볼만하다. 산을 오르다보면 발아래로 펼쳐진 길쭉한 성곽이 시선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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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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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국제조각공원에 있는 물놀이장   

 

평화를 염원하며 걷는 길

김포의 끝, 강화도와 마주 보는 초지대교 머리에 낭만과활력이 넘치는 대명포구가 있다. 서해에서 잡히는 각종수산물이 모이는 어업전진기지로 포구 한쪽으로 수산물시장과 어판장·횟집·함상공원 등이 자리한다. 함상공원에는 1944년 미국에서 건조돼 2차 세계대전과 월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상륙함(운봉함)을 전시해 놓았는데직접 배에 들어가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대명포구는 6.5㎞나 되는 평화누리길의 기점이기도 하다.평화누리길은 경기 북부 DMZ 일대의 안보관광지 및 자연생태계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다. 현재는김포-고양-파주-연천을 잇는 12개 코스(총연장 180㎞)가열려 있다. 덕포진 둘레길은 대명항에서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14.9㎞의 길 중 일부 구간(대명항-김포함상공원-덕포진-덕포마을-범선카페-대명항)으로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분단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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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어업전진기지인 대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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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 옆으로 난 덕포진 둘레길 

   

 

역사의 벽에 새겨진 숭고한 이름들

김포 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간다. 이곳은 김포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삼일절에 맞춰 개관했다. 김포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양촌 오라니 장터와월곶 군하리 장터(통진향교 일대)에서 일어났다. 1919년3월 24일과 25일, 고촌 신곡리 출신 김정의 지사에 의해이틀간 이어졌던 고촌 만세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김포 항일운동에 관한 짧은 영상을 감상한 뒤 본격적인전시 관람을 시작했다. 전시는 ‘1919년, 기미년을 기억하다’·‘김포평야, 만세 소리가 퍼지다’·‘호국과 애국의 고장김포’·‘김포의 항일의병’·‘독립을 일궈낸 김포의 항일운동’·‘추모의 벽’·‘기획전시실’의 순서로 이어졌다.

전시관 안의 빛바랜 태극기에서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육군 기록문서·애국열사의 형확정통지서·판결문·신상카드 등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애틋한 물건들에서 그날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내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벽 앞에 섰다. 다들약속이나 한 듯 엄숙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본다. 김포의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살눔·파고다공원과 김포를 오가며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충서·독립 의지를 탁월한 지도력으로 승화시킨 김정의·국채보상운동과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박용희 목사 등. 추모의 벽을 채운 수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이살눔은 김포 독립운동의 산증인이었다. 당시 33살의 늦깎이 학생이었던 그녀는 월곶 군하리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그들과 함께 독립을 외쳤다. 이 일로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그녀는 다시 고향 김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1948년 6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여전도사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에는 이살눔을 기리는 조촐하지만 다부진 기념비가 서있다.

 

“님은 1919년 통진교회 전도사로 월곶지역 3·1만세 사건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민족 해방을 몸으로실천한 님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만듭니다.” - 2003년 8·15 광복절 푸른언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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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독립운동기념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