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임시정부를 지키며 <BR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BR />여성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은 임시정부의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안위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중국 내 여성 동포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여성 독립운동계 통합에 앞장섰던 선구자적 인물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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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위해 노력하다

연미당의 본명은 연충효로,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중국 세관에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상하이(上海) 인성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진장(晋江) 여자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연병환을 비롯한 연씨 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이러한 집안 분위기가 연미당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27년 3월 연미당은 만 19세의 나이로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엄항섭은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로,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독립운동 세력 단결을 위해 힘썼는데, 1927년 11월 중국 관내지역 청년단체들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8년 9월에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하이지부 결성에 따라 각각 청년동맹과 청년여자동맹에서 활약하였다. 연미당은 1930년 8월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는데,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상하이 거주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2년에는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중심지에서 활약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수색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주도 인물이었던 남편 엄항섭이 먼저 피신하고, 연미당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자싱(嘉興)으로 이주하였다. 상하이를 떠난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연락 임무를 맡고,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연미당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여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 선전공작대와 함께 활동하였는데,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 모집과 함께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위문공연과 선전·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 등은 여성대원들에 의해 기획되었다.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도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하였다.

1940년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여성들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1943년 2월 23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가 개최되었다. 연미당은 조직부 주임을 맡아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는데,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거나 광복군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연미당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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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연미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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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당과 엄항섭의 결혼식(1927)

연미당과 엄항섭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에는 이시영·이동녕·김구·안창호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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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으로 피신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미당(1932)

(상단 우측 두번째가 엄항섭, 세번째가 김구, 하단 우측 두번째가 연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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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06.17.)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 여성들과의 연계 분투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연미당은 이 동맹에서 임원은 맡지 않고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상단 우측 세번째가 연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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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서(1943)

여성으로서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을 완성하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