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대한광복회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대한광복회<BR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대한광복회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회는1910년대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이 힘을모았던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편이다. 의열투쟁과독립전쟁의 시초가 된 그들의 투혼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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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부호들을 응징하고 국권회복 의연금을 모은 독립운동가 채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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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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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부사령을 거쳐 독립전쟁의 영웅이 된 김좌진 장군

 

 

 

1910년대 조선을 강타한 친일 부호 습격 사건

 

“지식이 있는 자는 서로 충정을 알리고 단결하여 본회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릴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재물이 있는 자는 각기 의무를 다하고 저축하여 본회의요구에 응하라. 나라는 회복할 것이요, 적은 멸망할 것이요,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1917년 조선의 부호들에게 의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위 내용이 담긴 포고문과 함께 재산 규모에 따라 할당 금액을 적은 ‘특별배당금증’이 동봉되어 있었다. 전국 부호들의 거주지와 재산 규모까지, 치밀하게조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에편승해 부를 쌓아가던 친일 부호들은 의연금을 낼 마음이 없었다.

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편지는 경성·대전·신의주 등 국내를 비롯해 중국 안동·봉천 등지에서 부쳐졌다. 발신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보니추적이 쉽지 않았다. 경찰이 수사에 애를 먹는 사이 친일 부호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터진다. 일명 친일부호 습격 사건. 1917년 1월 10일 칠곡의 대부호 장승원이 괴한의 습격으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한 것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내면서일제에 협조를 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대문에는 경고문한 통이 붙어있었다.

 

“오로지 광복을 외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도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를 주노라.”

 

독립운동을 돕지 않으면 응징을 내리겠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습격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2월 13일에는 문경 부호 조시영이, 12월 20일엔 안동 부호 안승국이 재물을 빼앗겼다. 독립자금을 내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장승원의 대문 앞에 붙어있던 경고문은 단순 엄포가 아니었던 셈이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이래, 국내 항일투쟁은 침체의 수렁에 빠져있었다. 그런 와중 친일파를 처단하는이들의 대담한 활동은 반전을 예고했다.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일본 공안 당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대적인 인원을 투입해 용의자 색출에 나섰고,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연 괴한의정체는 무엇인가?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이 힘을 모으다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 행락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개중엔 한복 저고리에 갓을 쓴 유생도있었고, 양복 정장과 단발머리가 말쑥한 신사들도 적지않았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시낭송회를 열었다. 이윽고 주최자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일어나운을 뗐다.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시와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조국을 회복하고 적을 물리치고 동포를 구하는 일은 실로 하늘이 내린 우리의 책무이자, 자손에게 물려주더라도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임무입니다. 국외 동포들과 국내 동지들을 상응시키고 외교적으로 일본을 고립시킨다면 도모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가로운 시낭송회로 가장하기는 했으나, 사실 이 회합은 비밀결사를 결성하는 자리였다. 대한제국 때부터 반목해온 의병 진영과 계몽운동세력이 힘을 합쳤다. 영주를 근거지로 활동한 풍기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달성친목회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게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대한광복회’가출범했다.

총사령에는 회합을 주도했던 박상진이 추대되었다. 그는양반 명문가 출신으로 16세 때부터 영남을 대표하는 의병장 허위에게 유학을 배웠다. 20대 초반에는 양정의숙에들어가 법률과 경제 등 신학문에 눈을 떴다. 이는 박상진이 의병 진영과 계몽운동 세력을 아우르며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설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1908년 13도 창의군의 선봉에서 일본군과 싸워온 스승허위가 붙잡혀 처형당하고 1910년 나라마저 완전히 국권을 상실하자, 박상진은 판사의 꿈을 접고 중국으로 떠났다. 당시 대륙에서는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는 대격변,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지에서 혁명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박상진은 조국 광복의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비밀 결사를 결성, 자금을모으고 봉기를 준비하는 한편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림의 골자였다.박상진은 계획을 점검하고자 서간도에 정착한 허위의 형,허겸을 찾아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이끄는 신민회 인사들을 소개받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그는 이시영, 주진수 등과 교류하며 광복회의 청사진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지않았다. 먼저 국내에서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을 규합해야 했다. 국권 회복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꽤나 컸다. 유학자 중심의 의병들이 복벽(復?), 즉 왕실 재건을 꿈꾼 반면에 신학문을 공부한 계몽운동가들은 국민 중심의 공화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의병과 계몽운동 중 어떤세력도 국내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일제는 경술국치를 전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며 조선 땅에서 의병의 씨를 말렸다. 계몽운동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일망타진되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이제정치적 이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독립의 대의를 바라보고힘을 모으는 일만이 살길이었다.

박상진은 의병 진영에서 우재룡과 권영만을 영입, 지휘장으로 임명했다. 스승 허위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맹장들이었다. 또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도 의병 출신이었다. 계몽운동 세력에서는 이관구·최준·김재열 등이 참여했다. 뒤에 영입한 김좌진도 계몽주의 지식인 인사였다. 이처럼 대한광복회는 지역과 사상을 망라하며 조직의 형태를 나갔다.

국외 독립군 기지는 중국 지린에 뒀다. 길림(지린)광복회는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동포들을 모아 독립군으로 길러냈다. 자체적으로 토지를 경작함으로써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 또한 도모했다. 초대 책임자는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 그는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지부장으로서 길림광복회를 이끌었으나 1916년 일제 공안당국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진룡의 후임으로 들어온 이가 바로 김좌진이다. 국내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으고 군사전략을 연구한 김좌진은 박상진과 김한종 등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1917년 지린으로 향했다. 대한광복회의 독립군양성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김좌진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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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과 계몽운동 세력이 힘을 합쳐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대구 달성공원(1910)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1915년 12월 24일 새벽, 공금 8,700원이 사라졌다. 경주 일대에서 거둔 토지세로 행낭에 담아 마차로 운송 중인 돈이었다. 일본 경찰은 비상선을 치고 즉시 수색에 들어갔으나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워낙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도 대서특필했다.

 

“마부는 새벽 바람이 몹시 차가운 고로 방한구를 입고 마차 앞에서 채찍질에 여념이 없었다. 무열왕릉 근처 언덕을 올라갈 때 바람이 더 심하게 불어서 마차 승객도 외투에 몸을 묻었다. 마차가 아화 방면을 향해 진행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문이 열려있어 살펴보니 같이 오던 손님도, 행낭 속의 공금도 간곳이 없었다.”

 

훗날에야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의 소행이었다. 권영만은 대구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며 마차에 올라탔고, 우재룡은 경주와 아화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해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마차가 적당히 느려졌을 때, 권영만은 행낭을 찢어 공금을 훔친 뒤 우재룡과 함께 종적을 감춰버렸다.

공금 수송 마차 습격은 대한광복회의 전술 중 하나였다.일제의 세금을 탈취해 식민 지배에 타격을 입히고 독립군 자금도 손에 넣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당시 광복회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 사업은 군자금 확보였다.독립군을 양성하고 무기를 마련하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전국의 부호들에게 의연금을 요청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국내외에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던 광복회는 지부와 연락거점을 동원해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각지에서 부호들의재산 규모를 조사해 금액을 배당하고 다른 곳에서 포고문과 특별배당금증이 담긴 편지를 발송했다. 그러나 모금액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협조하는 부호들이 있기는 했지만 금액이 적었고, 친일로 기울어진 이들은 당국에 밀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광복회는 방침을 바꿨다. 친일 부호들을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을 중심으로비밀결사가 움직였다. 1917년 11월 칠곡 부호 장승원을 습격함에 이어 차례대로 조시영과 안승국을 처단했다. 이듬해 1월에는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이 나섰다. 응징의 대상은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 박용하는 면민을 학대하여 원성이 높았는데, 광복회의 편지를 일본 헌병대에밀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광복회원들은 기밀누설의 책임을 물어 권총으로 박용하를 처단하고 경고문을 붙였다.하지만 이 거사로 인해 광복회는 꼬리를 밟히게 된다.

사건 수사를 맡은 천안 헌병대는 관내 부호들이 받은 불온 편지 대부분이 경성에서 부쳐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경성과 인천을 자주 왕래하던 장두환이 먼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기시작했다. 총사령 박상진과 지부장 채기중, 김한종 등이잇따라 검거되었다.

1921년 이들 대한광복회 요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그러나 일제와 친일 부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비밀결사의 투혼을 사라지지 않았다. 우재룡과 권영만을 비롯한남은 회원들은 광복단 결사대를 꾸려 의열 투쟁을 이어갔다.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된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청산리대첩을 일구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막을 올렸다. 대한광복회의 정신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치 신호탄을 쏘아 올리듯, 대한광복회는 수많은 독립군 활동과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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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사형 집행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 08. 13.)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