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추억

한국 명란과 일본 멘타이코의 뿌리

한국 명란과 일본 멘타이코의 뿌리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한국 명란과 일본 멘타이코의 뿌리


우리가 즐겨먹는 파스타 메뉴를 살펴보면 명란을 주재료로 한 스파게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게 알이나 철갑상어 알로 만든 정통 스파게티 못지않게 품격 있는 맛을 자랑하는 명란 스파게티. 누가 이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


일본인의 명란 사랑

뜻밖에도 명란 스파게티가 개발된 곳은 이탈리아나 명란젓의 본고장인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이다. 1967년 도쿄 중심가 시부야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처음 판매했는데, 일본인 입맛에 맞았는지 젊은이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 최근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사실, 명란 스파게티는 일본 NHK 교향악단 단원의 향수 때문에 생겨난 요리다. 어느 날 이 음악가는 자신이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먹던 캐비아 스파게티가 그리워졌다. 당시 일본에는 값비싼 캐비아를 가지고 만든 스파게티가 없었기에 직접 캐비아 통조림을 사서 단골 전문점을 찾아가 주인한테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현지만큼은 못해도 향수를 달래줄 정도는 됐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이따금 식당을 찾아 캐비아 스파게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단골손님이니 들어주기는 했지만 레스토랑 주인도 유럽에서도 3대 진미로 꼽는 식품인 캐비아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명란 스파게티다.

캐비아 대신 명란을 넣은 스파게티를 맛본 음악가도 만족했고, 시험 삼아 먹어 본 고객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후 레스토랑 주인은 음악가의 양해를 얻어 아예 메뉴로 개발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유행했고 이어 지금은 우리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명란을 뜻하는 일본말인 멘타이코(明太子) 스파게티 내지는 도쿄 스타일 캐비아 스파게티(tokyo style fish roe pasta)로 불리며 대표적인 일본식 스파게티가 됐다.

그런데 스파게티와 명란젓을 접목시킨 것을 보면 일본 사람도 우리처럼 명란젓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통계를 보면 일본의 명란젓 소비량은 연간 약 3만 톤으로 1인당 일 년에 12번 정도는 명란젓을 먹는다고 한다. 전체 인구로 계산한 숫자니까 성인만 놓고 보면 최소 한 달에 두세 번 내지 서너 번은 명란젓을 먹는다는 계산이 나오니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 더 많이 명란젓을 소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 언제부터 이렇게 명란젓을 즐겨 먹게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명란 맛을 안 일본

일본 사람들은 원래 전통적으로 명란을 먹지 않았다. 과거 일본에서는 명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명태와 비슷한 대구 알은 먹었어도 명태 알은 먹지 않았다.
일본인이 명란을 먹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히구치 이즈하라라는 순사가 우리나라 사람이 명란젓 먹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가져가 상품으로 개발했다. 명태도 아닌 알만 연간 1,500t을 가져갔다고 하니 일제 강점기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명란을 거의 싹쓸이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명란 수입은 2차 대전 패망 직후 한때 중단됐다가 1949년 카와하라 토시오라는 사업가가 조선 땅에서 먹던 명란 맛을 잊지 못해 후쿠오카에서 다시 명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 신칸센이 생기면서 백화점에 명란을 선물용으로 납품하기 시작했고,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후쿠오카 명란이 유명해지게 된 배경이다. 그 결과 명란은 한국어 이름보다 일본어인 멘타이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명란 스파게티는 물론 명란젓에 마요네즈를 섞어 캐비아처럼 빵에 발라 먹는 명란 크림, 샐러드에 뿌리는 명란 후레이크 등 명란을 활용해 개발한 다양한 일본 상품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명란 대신 멘타이코 라는 이름으로 백화점 진열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멘다이코로 둔갑한 명란을 먹으며 드는 생각 하나. 그동안 우리는 남이 가진 것만 귀하게 여기고 부러워했을 뿐 정작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가꾸고 발전시킬 생각은 못 해온 게 아닐까? 김치나 인삼 등 우리의 것들이 우후죽순 다른 이름으로 팔려가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한 번쯤 되짚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수많은 문제의 답은 우리 안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