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통합의 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BR />굽이굽이 이어진 통합의 길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통합의 길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네 번째 이야기는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지금부터 자주독립을 위한 통합운동의 역사를 함께 만나보자.


 

국호를 정하고 임시헌장을 채택하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으로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신한청년당 등 상하이 독립지사들이 조직한 임시의정원의 첫 회의를 여는 순간이었다. 이동녕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29명의 대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토의에 들어갔다.
새 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해졌다. 관제는 ‘국무총리제’로 하고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이 그 자리에서 선출되었다. 이어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밤새도록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와 귀천, 빈부와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하다….”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들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구 황실을 놓고 이견이 나왔지만 우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본국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결정했다. 임시의정원 회의는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1919년 4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의 헌법 격인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3·1운동의 함성이 바다를 건너와 상하이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을 통합하고, 1919년 9월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초대 대통령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외교역량을 발휘해온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은 안창호였다. 그는 출신과 이념, 입장이 제각기 다른 독립지사들을 설득하며 조직을 정비해나갔다. 당시 안창호와 신채호가 나눴다는 대화는 통합 임시정부의 성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안창호 : “단재, 당신은 조직의 결정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소?”
신채호 : “그렇습니다.”
안창호 : “그렇다면 당신이 볼 때 이승만이 조직의 결정을 따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신채호 : “아닙니다.”
안창호 : “자 그럼 우리가 모두 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누가 양보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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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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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에 11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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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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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

 

 

마침내 이뤄낸 좌우 연립정부

안창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로 대표되는 좌우간의 불거진 대립이 1921년 요인들의 집단 탈퇴로 이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이냐 재창조할 것이냐 등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이 혼란을 잠재우면서 임시정부의 고삐를 쥔 사람이 바로 김구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새로이 도입한 최고위직인 국무령에 취임했다. 이후 김구는 일제의 탄압과 고질화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활로를 모색했다. 고심 끝에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일제의 수뇌부 암살작전을 펼쳐나갔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마차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곧이어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전승 축하잔치에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필두로 침략전쟁의 사령탑을 대거 처단했다.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감을 부각하려 했고 의도는 적중했다. 먼저 미국에 있는 한인단체로부터 성금이 몰려들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곤경을 겪던 중국 기관들도 자금을 대고 지원에 나섰다. 심지어 중국의 국민당 정부까지 한인 독립운동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김구는 난징의 중국 중앙군사학교에서 장개석 총통과 협상을 벌여 한국 청년들이 뤄양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임시정부의 활약만큼 일제의 탄압도 한층 거세졌다. 일본의 군경은 프랑스 조계까지 들어와 한국인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임시정부는 근거지를 항저우로 옮겨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공격하자 임시정부도 머나먼 피난길에 올랐다.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이어지는 유랑생활은 고단했다.

한편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사에 머물고 있을 무렵 민족진영만이라도 통합하자는 의견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한국국민당의 김구와 조완구, 조선혁명당의 지청천과 현익철,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 그밖에 몇몇 사람이 난무팅(楠木廳) 2층집에 모였다. 회의를 이어가던 중 괴한이 침입해 권총을 난사했다. 이 총격으로 김구가 심장 근처에 탄환을 맞고 입원했으며, 현익철은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체포됐지만 타격이 컸다.

그럼에도 통합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다. 1939년 치장에서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 서명한 좌우합작 성명서가 나왔다. 이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측을 크게 통합하기 위해 7당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막판에 사회주의 계열이 빠져나가면서 통합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듬해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맡았던 이동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의 3당만이라도 합치라는 유언을 남겼고 1940년 5월 통합 한국독립당이 탄생했다.

임시정부는 이후 1940년 9월 충칭에 청사를 마련하고 얼마 후 김구 주석 단일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중경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전시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오랜 세월 준비해온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국내를 비롯해 만주 등 각지에서 모여든 장정들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는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동참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총사령관 지청천, 1지대장 김원봉, 2지대장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의 지휘 아래 훈련에 돌입했다.

그 무렵 중경은 일본군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초기 청사 두 곳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공격에 대응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3년 11월에는 미국·영국·중국이 카이로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서에 서명했다. 일본과 제대로 맞서 투쟁하는 것은 물론 머지않을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민족 차원의 통합을 다시 한번 추진해볼 필요가 있었다.

끈질긴 통합 노력이 빛을 본 것은 1944년 4월의 일이었다. 우익인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과 좌익인 민족전선(조선민족전선연맹)이 마침내 힘을 합치기로 결의한 것이다. 4월 22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좌우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정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고루 목소리를 내면서 임시정부의 위상도 높아졌다. 좌우 연립정부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환국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통합의 성공적 경험은 자연스레 해방 후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지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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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를 지탱하며

통합의 길을 걷게 한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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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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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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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쳐 달라

1945년 8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산시성(陝西省)에서 광복군의 특수훈련을 점검하고 있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최종 테스트였다. 그는 젊은 전사들의 열정과 노력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은 희소식이 아니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는 이 사건에 대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비록 일본의 패전이 확정되고 민족은 해방을 맞았지만, 김구가 열망한 것은 단순한 광복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자주독립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해방된 이 땅에는 3·8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임시정부는 9월 3일 “새 정부는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해야 하며, 과도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서울에 들어선 미군정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은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동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군정은 좌우 연립이라는 임시정부의 색깔을 우려해 철저히 무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임시정부 환국 소식은 곧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12월 19일에 열린 개선대회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강대국들은 부인했지만 3,000만 동포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새 나라의 희망으로 여겼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신탁통치 결정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의는 빛을 바래갔다.
중국에서 좌우 연립정부의 산파 노릇을 한 김구는 이번에도 남북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3·8선을 넘어갔다. 평양에서 회담을 열어 통일의 바람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이 뜨거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는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김구도 저격범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계승해야 할 법통이란 무엇일까?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쳐 달라”고 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소앙의 유언이 떠오른다. 그들에게는 독립이 곧 통합이요, 통합이 바로 통일이었다.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임시정부가 남긴 미완의 숙제를 돌아볼 시간이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