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산과 강 그리고 계곡이 어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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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산과 강 그리고계곡이 어우러지다

-충청북도 영동-


때 묻지 않은 자연을 품은 영동은 천태산·민주지산·삼도봉·백화산과 같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다. 이러한 산간지형은 곳곳에 강과 계곡·소·폭포를 만들어 절경을 빚어낸다. 천혜의 풍경에 유구한 역사와 체험·배울 거리가 더해져 영동여행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금강산을 옮겨놓은 듯한 한천팔경

영동여행은 경북 김천과 경계를 이룬 황간에서 시작한다. 첫 번째로 만나볼 여행지는 바로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노근리. 이곳은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민간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은 학살 현장으로, 쌍굴다리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인근으로는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평화공원이 조성되어있으며, 공원 안으로는 평화기념관과 희생자위령탑·교육관 등이 설립되어 있다.

이번엔 해발 407미터의 월류봉에 올라보자. 한천팔경의 하나인 이 기묘한 모양의 산봉우리는 동서로 6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능선을 이루는데, 북쪽은 냇물을 따라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 지대다. 한천팔경의 자태는 월류봉의 가진 여러 면모를 이르데, 제1경부터 8경까지의 풍경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중국의 계림을 연상케 할 만큼 수려하다.

월류봉 아래로 흐르는 맑고 우렁찬 물줄기는 금강으로 향한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가르는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초강천의 한 갈래다. 초강천은 물이 맑고 차기로 유명한 물한계곡을 이루고 다시 추풍령 계곡물과 만나 월류봉으로 흘러든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강변 백사장은 사철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월류봉 아래에는 우암 송시열이 머물렀던 한천정사가 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인 32세가 되던 해부터 한천정사에서 많은 날을 보냈는데,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한편 한천팔경이라는 이름은 이곳 한천정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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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월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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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아픔이 남아있는 노근리 쌍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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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머물렀던 한천정사

 

 

봄이 찾아온 석천계곡과 반야사

월류봉을 벗어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울창한 수풀이 우거진 석천계곡과 반야사에 닿게 된다. 계곡을 따라 오도카니 들어선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에 상원 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경내의 삼층석탑과 배롱나무 두 그루가 절집 특유의 고요함을 더해준다. 옆으로 난 석천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문수전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올라앉은 문수전은 백화산의 기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조망 장소다. 남북으로 뻗은 날카로운 주능선 양옆으로 호랑이 꼬리 같은 계곡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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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수풀이 인상적인 석천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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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산 자락에 안긴 반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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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전에서 본 훤칠한 산줄기와 깊은 계곡

 

 

학산을 지키는 철새와 ‘독립문 나무’ 

용화에서 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학산면 봉림리의 작은 시골 마을을 만나게 된다. 골목으로 돌아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고택이 있으니 바로 성위제 가옥이다. 안채와 사당·담장은 기와집이고 사랑채·광채·문간채는 초가로 돼 꽤나 멋스럽다. 대문 앞에 연자방아가 있고 대문채로 들어가면 널찍한 안마당이 나온다. 사랑채에는 두 칸의 온돌방과 한 칸의 골방이 있으며 골방 뒤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다.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두어 방을 구획했고 사랑방의 뒷문을 열면 흙벽 사이로 안채의 부엌문이 보이는데 이 문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봄마다 찾아오는 수백 마리의 왜가리와 백로 떼는 이 마을의 반가운 손님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와 참나무 숲에 보금자리를 틀고 지내다 찬바람이 부는 9월경 떠나 이듬해 다시 찾는다. 왜가리와 백로는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영물로, 많이 날아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전해진다.

미촌마을에서 3㎞ 떨어져 있는 박계리 마을 입구엔 수령 350년 이상 된 독특한 생김새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일명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에 유독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3·1운동 때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연인 즉,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조직 구성원 간의 원활한 연락이었다. 이때 한양과 지방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이 나무를 연락책 삼아 일본 순사의 유무와 독립군의 활동 정보를 주고받았다. 늠름한 마을의 수호신인 이 나무는 오늘도 그 깊은 사연을 간직한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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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제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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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서식지를 알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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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 마을에 위치한 독립군 나무

 

 

애국지사의 고장 영동

영동은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에는 관내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양산초등학교 내의 3·1독립운동기념탑을 필두로 지내리의 3·1독립의거기념비, 영동체육관 앞 독립유공자 기념탑, 영동읍 3·1운동기념비 등 국권 회복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곳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영동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심석재 송병순이 있다. 그는 경술국치 때 순국한 애국열사로 우암 송시열의 후손이자 대전 회덕 출신 애국지사인 송병선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구국 활동에 전념하다 순국 자결한 인물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영동역 광장에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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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읍내에 위치한 3·1운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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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역 광장에 건립된 송병순 동상

 

 

금강이 만든 양산팔경

양산이 아름다운 까닭은 사철 마르지 않는 금강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은 주변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며 양산팔경을 빚어냈다.

영국사는 그중 제1경이다. 절을 에워싼 천태산은 ‘충북의 설악’이라 일컬어질 만큼 수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빼어나다. 영국사로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암반을 타고 내리는 3단폭포가 나타난다. 폭포 앞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천태산을 베게 삼고 누워 있는 영국사의 전경이 한눈에 잡힌다. 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은행나무는 이 절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높이 35m, 둘레 11m의 우람한 몸체도 놀랍거니와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와 땅 위로 드러나 비틀린 뿌리는 가히 장관이다. 이 은행나무는 천재지변이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소 울음소리를 내며 운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영국사 이외에도 해넘이가 아름다운 비봉산, 강변의 높다란 대 위에 노송과 정자가 어우러진 강선대, 시인 묵객들의 쉼터였던 함벽당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팔경에는 들지 않지만 양산 중심지인 송호리 강변의 송림도 빼놓을 수 없다.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들어차 있는 솔밭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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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들머리에 있는 영국사

 

난계 박연의 고향

옥계폭포 가까이에는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난계 박연의 영정을 모신 난계사당이 있다.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난 박연은 조선 세종 때 석경·편경과 같은 아악기를 만들고 악서를 편찬하는 등 우리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사당 외에 난계국악박물관·천고각·국악기체험전수관 등 박연과 국악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천고는 울림판 지름이 5.54m, 무게는 7t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