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신흥무관학교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신흥무관학교

글 박영규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신흥무관학교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독립군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나아가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가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의 일환으로 만든 군사학교다. 이를 위해 이동녕·이회영·장유순·이관식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답사한 끝에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부지를 확정하였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먼저 이회영은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자금을 확보한 후 60여 명의 가족과 친척을 대동하고 만주로의 대탈출을 감행했다.
이외에도 이상룡·김창환·이동녕·여준·이탁 등 각 도의 신민회 대표들도 가족을 거느리고 삼원보로 이주했다. 그리고 1911년 4월,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원보 고산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독립 기지 건설을 결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모두 농사를 짓는다)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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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만주 유하현 삼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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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신흥강습소 터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토대를 다지다

결의 직후 신민회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장에 이철영, 부사장에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과 이원일, 학문에 이광과 여준, 재무에 이휘림과 김자순, 조사에 황만영과 박건, 조직에 주진수와 김창무, 외무에 송덕규와 정선백을 선임했다. 경학사는 외면적으로는 농사를 짓고 교육하는 회사 조직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민회의 해외 정치조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장에는 이동녕이 선입되었고·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이관직 등이 맡았으며,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삼원보가 너무 번잡하여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부지비용은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전답 6,000석을 팔아 부담하였다.
한편, 경학사 운영은 원만치 못했다. 개농주의에 따라 주민 전체가 농토를 개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서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곧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경학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인 부민단을 창설했다. 이는 경학사보다 더욱 정치적인 기관으로, 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10호·100호·1000호 단위로 나눠 패·구·지방으로 구분하였다.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을 각 1명씩 두었다. 이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표자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
둘째, 동포간의 소송 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를 둘 것.
셋째, 각 지방의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 간부 양성 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관에서 책임질 것.
넷째, 흉작과 인명 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

 

한편 1913년 5월 신흥중학교로 개칭한 신흥강습소는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유지하였다. 이후 신흥중학교는 1919년 5월3일에 신흥무관학교로 개명되면서 본격적인 무관 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후 일본 육사 출신 지청천을 비롯하여 윈난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학교의 명성은 점점 올라갔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설립 이후 2년간 지속된 대흉작으로 재정난을 겪어야 했고, 학생들 사이에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한 갈등이 심화되어 피살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마적들의 습격으로 교감을 맡고 있던 윤기섭을 비롯하여 교관과 학생들이 납치당하는 등 악재가 이어졌고 1920년 8월, 끝내 폐교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비록 신흥무관학교는 사라졌지만, 그간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2,000여 명은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핵심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간도 지역의 독립무장단체 서로군정서 등에도 상당수의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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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백서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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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지청천과 이범석

 

 

이회영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되다

1932년 11월 18일, <만주일보>에 수상한 노인이 중국 다롄의 수상경찰서에서 목을 매어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세간에서는 그가 이회영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 기사를 접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그 노인을 독립운동의 중대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경찰서는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신문들의 추측대로 그 노인은 바로 이회영이었다. 또한 자살한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 독립운동의 대부였고, 독립운동의 주춧돌을 놓았던 그는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선비의 기개를 널리 떨친 선각이었다.

청년 시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이회영은 을사늑약 이후에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무력 항쟁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하여 김구·이동녕·양기탁·이동휘 등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이 이뤄지자, 형제들과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부터는 동생 이시영 등과 다른 길을 택했다. 3·1운동 이후 이시영·김구·안창호 등이 주축이 되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이회영은 권력 투쟁으로 임시정부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예상대로 계파간의 알력과 갈등으로 인한 권력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때마다 이회영은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신채호와 함께 진영의 화합을 위해 임시정부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내부의 투쟁이 치열해져 조직이 사분오열되자 이회영은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1928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의 연합체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의 독립과 무정부주의 운동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편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상하이 조계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이회영은 1932년 11월, 거점 확보와 관동군 사령관 무토 암살을 위해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의 잠입은 상하이에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연충렬과 이규서에 의해 다롄 경찰에 보고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이회영은 일제의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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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이회영은 민족주의자이자 동시에 인본주의자였다. 스스로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여 동등하게 대우했고, 독립을 이루되 만인이 평등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따라서 그가 택한 무정부주의자의 삶은 곧 개인의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 이상주의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