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글 학예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윤현진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윤현진은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의 핵심 인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진정한 애국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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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에 참여하다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윤현진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15세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22세가 되던 1914년에 윤현진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신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반제국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신아동맹당에 가입하여 집회와 연설·서적 배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온 윤현진은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과 백산무역주식회사·의춘상행·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비밀결사운동과 경제적 자립운동·교육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윤현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으로 선정되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국내의 항일세력과의 협력을 위해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2월에는 재무총장 이시영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차장급 인사들을 대표하던 윤현진은 의견이 대립하여 분열하는 상황에도 임시정부의 혁신과 개조를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윤현진은 1921년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안창호를 비롯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16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하였다. 정부는 윤현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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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시절의 윤현진(19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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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구명학교 개교식 기념사진(19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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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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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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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의 장례식(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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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새겨진 윤현진의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