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덕진풍 다리풍으로 불리던 전화
백범 김구를 살리다

덕진풍 다리풍으로 불리던 전화 <BR />백범 김구를 살리다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덕진풍 다리풍으로 불리던 전화

백범 김구를 살리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3월이었다. 청나라 시찰단으로 갔던 유학생 상운이 귀국할 때 전화기 두 대를 가져와 첫 시험 통화가 이루어졌다. 뒤이은 1896년 궁궐 내부에는 궁중 전화기 9대가 설치되었으며, 인천 감리영까지 연결됐다.그런데 이 전화 때문에 백범 김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내막이 담겨있었을까?


김구를 살린 전화기

1896년 만 20세의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아포의 여관 겸 주막에서 머물던 중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의 거친 행동에 분개하여 그를 살해한다. 직후 필기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써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거리에 붙였다.

 

‘무참히 살해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가 이 왜인을 죽였다.’

 

사건 3달 뒤, 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으로 옮겨졌다. 당시 인천 감리영에는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 재판소가 있었다. 감옥에 갇힌 김구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인천감리이자 경무관인 김윤정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안악의 치하포에서 왜인을 죽인 일이 있느냐?”
“그렇소.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인 한 명을 때려죽였소.”

 

일제는 김구에게 살인강도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고종황제의 재가가 떨어지면 곧장 목숨을 잃게 될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에 법무대신은 사형수 명단을 가지고 고종의 집무실로 향했고 별 이의 없이 결재가 내려졌다. 그때 입시했던 승지 가운데 한 명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창수의 죄명이 바로 국모보수,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승지는 심문서를 다시 고종에게로 가져갔다. 이를 천천히 살핀 고종은 곧바로 어전회의를 열었다.

 

“김창수는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왜인을 죽였다 하오.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야 없지 않겠소?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토록 하라.”

 

결국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김구의 사형집행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인천 감리영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김구는 정말 운이 좋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설치된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전화 한 통이 김구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개통이 나흘만 늦었어도 고종은 김구를 살리지 못했으리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전화기의 역사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화기를 덕진풍·다리풍·전어통 등으로 불렀다. 덕진풍과 다리풍은 텔레폰(telephone)이라는 영어 발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고 전어통은 ‘대화를 전달해 주는 장치’라는 뜻의 한자어다.
한편 전화는 1896년 첫 도입 이후 1902년 3월 20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외전화가 가설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시내 교환 전화가 개통되었다. 당시만 해도 전기와 전화는 낯설고 기괴한 물건이었다. 전국에 가뭄이 들자 사람들은 “하늘의 전기 바람이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 바람이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멀리했다. 따라서 1902년 전화 가입자는 24명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22명이 일본인이었고 2명만이 한국인이었다.
고종은 전화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는 전화기가 놓여있었는데, 고종은 이를 이용해 신하들에게 업무지시를 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관복으로 환복 후 전화기를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두 손으로 공손히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댔다. 물론 내시가 미리 전화 받을 시각을 알려주었기에 관복을 입고 고종의 전화를 기다릴 수 있었다.
대신들은 황제가 전화를 거는 것은 권위와 체신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이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고종은 대왕대비인 신정왕후릉이 있는 동구릉까지 임시로 전화를 가설했다. 참배하러 가기엔 너무 멀어 아침저녁으로 전화로 곡을 하기 위해서였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뒤를 이어 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순종도 아버지인 고종만큼 전화를 많이 사용했다. 순종은 창덕궁과 덕수궁 사이에 전화를 가설했다. 그리고 하루에 4번씩 덕수궁에 있는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올렸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순종은 덕수궁에 차린 혼전과 고종의 능인 홍릉에 직통전화를 놓았다. 그리고 상복을 차려입고 수시로 전화로 곡을 했다. 아버지의 문상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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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선 교환방식의 전화 교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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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전화기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