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완전 독립을 선언한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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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금표(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교수)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은 영연방 내의 자치국 지위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영국 지배를 몰아내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것으로 목표가 전환되었다. 이러한 목표 전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자와할랄 네루이다.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의 쌍두마차로 불린 네루. 그가 그린 독립 인도의 청사진은 어떠했으며, 독립운동을 어떻게 이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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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할랄 네루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

인도의 독립운동은 누가 이끌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간디’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도의 독립운동에는 여러 노선이 있었다. 비폭력 투쟁을 주장한 사람들,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영국의 지배를 그대로 두고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그리고 종교에 따라 국가를 분리해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이 서로 대립했을 때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였다. 간디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였다. 간디가 주도한 로울라트법안 반대 투쟁, 소금행진, 큇인디아(Quit India) 운동 등에서 작은 폭력이라도 발생하면 즉각 투쟁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투쟁이 중단된 사이 조직은 와해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구속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서 간디의 투쟁에 합류했던 여러 노선의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간디가 독립운동의 시작과 중지를 선언하면, 간디에 맞서거나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직 네루만이 간디를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네루의 설득으로 간디가 비폭력 주장에서 물러선 적은 없다. 단지 간디는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했을 뿐이다. 또한 네루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종파 갈등에서 중재력을 발휘하였다. 간디가 주도한 독립투쟁의 준비와 진행, 폭력 발생으로 간디가 물러난 공백을 해결하는 일은 모두 네루의 몫이었다.       

네루가 없었다면 간디의 투쟁은 실현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을 것이며, 폭력 발생에 대한 대처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디와 네루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로 인식되고 있다. 


완전 독립을 추구한 독립결의안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여러 차례 인도통치법을 개정하였다. 인도통치법 개정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의회제도를 도입했고, 참정권을 확대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는 1885년 12월 28일에 창립된 이래 매년 12월 말에 개최하는 연차총회를 통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인도 총독 ‘어윈(Lord Irwin)’은 인도통치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던 1929년 10월 31일에 “인도통치법 개정의 목표는 자치권 부여”라고 발표했다. 영국의 발표에 대해 1929년 12월 29일에 개최된 인도국민회의 연차총회에서는 네루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독립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의장이 된 네루는 “전국 각지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투쟁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몰래 숨어서 하는 시간은 지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나라를 외국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논의합니다. 동지 여러분, 남녀 동포 여러분 모두 이에 참여합시다. 비록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고통, 투옥 심지어는 죽음일지라도 여러분들은 인도를 위해, 지금의 속박으로부터 인류의 자유를 위해 한몫을 했다는 만족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연설하며 1930년 1월 26일을 독립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인도는 자치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 독립(Purna Swaraj)을 추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네루가 결의안을 발표하고 참석자들이 완전 독립에 매진할 것임을 서약한 것은, 인도에서 영국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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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복지를 강조한 네루 탄생일을 인도의 어린이날로 지정(11. 14.)


준비된 독립 인도의 청사진

인도는 1757년에 영국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1858년에 영국 여왕이 인도를 다스리는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2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는 독립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투쟁과 피를 흘렸으며, 마침내 1947년 8월 15일에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자정을 기해 독립하게 된 국회의사당에서 역사적인 독립식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네루는 “오래전 우리는 운명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맹세를 이행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자정이 되면 인도는 생명과 자유로 깨어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 순간에 오랫동안 억눌려온 국가의 혼이 되살아날 것입니다”라는 연설을 하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을 기렸다. 네루의 독립 기념 연설은 ‘운명과의 밀회(Tryst With Destiny)’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시아의 많은 식민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했으나, 독립 이후의 정치·사회는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반면 인도의 경우 독립을 이끈 네루가 집권함으로써 이미 독립 인도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독립 이후 75년이 된 지금까지 인도의 헌정질서가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루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외교적으로는 비동맹, 종교적으로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속국가를 근간으로 하는 청사진을 마련했다. 195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국가 기간산업과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한 정책으로 경제적 안정을 추구했다.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 체제로 신생 독립 국가들이 강대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영의 강대국에 의존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 독립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네루는 “우리나라 독립성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며,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을 외교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러한 네루의 청사진을 바탕으로 인도는 비동맹에 동조하는 제3세계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간디였다. 하지만 네루가 있었기에 독립 이전부터 독립 이후의 인도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 수 있었고, 준비된 상태에서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 후 네루는 그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인도 총리로서 인도의 헌정질서에 혼란 없이 인도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럼에도 식민지배하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군사 쿠데타 혹은 내전을 겪으며 헌정질서가 붕괴되었던 것과는 달리 인도의 헌정질서가 75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간디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의 역할을 하는 한편 인도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마련했던 네루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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