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그 많던 초등학교 내 

봉안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몇 해 전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광복 직후 마을 청년들이 교내 봉안전을 때려 부수자, 이를 본 학생이 달려와 청년들을 말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등교할 때 반드시 봉안전에 절을 하라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켰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마을 청년을 말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고, 결국 교사직을 그만뒀다고 한다. 그 얘기를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전주 지역 답사를 하던 중 전주초등학교 내 ‘독립기념비’를 보고 새삼 그분의 말이 떠올랐다. 더욱이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15일에 봉안전을 헐고 그 기단 위에 ‘독립기념비’를 세웠다는 데 남다른 감회를 가졌다. 


일제강점기 봉안정이란

봉안전은 일본어로 ‘호안덴(ほうあんでん)’이라 하는데,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의 학교에 일왕·왕후의 초상과 ‘교육칙어’를 넣어두던 구조물이다. ‘교육칙어’는 1890년 10월 일본의 메이지 왕이 ‘천황제’에 기반을 둔 교육 방침을 공표한 칙어로써, 천황의 신격화와 일본 국민의 정신적 규범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도 이를 교육 전반의 기본 규범으로 정하고, 1912년까지 대부분의 공립보통학교에 사본을 교부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 8월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부임하면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신사참배, 국기 게양 행사, 황국신민서사 제정, 창씨개명, 궁성요배 등이 강요되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만들더니 아예 교과 과정에서 제외되었으며, 봉안전 설치와 더불어 교육칙어뿐만 아니라 일왕의 사진도 이에 보관토록 하면서 격이 달라졌다. 이후 교육칙어는 우상화되었고, 일왕 사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교사도 있었다. 봉안전 안전을 위해 교원의 숙직, 당직 규정이 강화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봉안전은 학생과 교사에게 모두 위압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봉안전 건립에 친일파들은 건설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봉안전은 대개 교문 주변이나 교실로 들어가는 중간 어딘가에 단을 쌓아 높게 설치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등하교 할 때 반드시 봉안전 앞을 지나가야 했고, 그때마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는 최경례를 하고 손뼉을 두 번 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점차 학생들의 일상이 되어 갔다. 이외에도 패망 이전까지 일본 제국의 4대 공휴일(1월 1일, 기원절, 신무천황제, 천장절)에 각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은 봉안전 앞에 줄을 서서 최경례를 올리고,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하는 등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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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초등학교 내 봉안전 기단 위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일제 잔재만으로 여겨야 할까

일제 말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봉안전 앞에서 최경례를 하고 이를 어기면 매우 혼났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얼마나 강요된 굴종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고인이 된 이규태 기자의 칼럼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복되던 날 봉안전이 부서지고 교실에서 일왕 사진이 뜯겼는데, 이를 청소하는 것이 당번이었던 그에게 맡겨졌다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주력(呪力)이 붙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구기거나 찢거나 하면 신명(神明)의 노여움에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한다. 결국 어린 마음에 사진을 어찌하지 못하고 책갈피 속에 넣었는데, 허리가 아프다는 일왕의 꿈까지 꿀 정도였다. 이후 어머니에게 그러한 사실을 고백하고 태워 땅에 묻어버렸는데, 그 신명이 뒤통수를 잡아끄는 착각이 들어 지레 겁을 먹고는 큰절을 하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는 어린 학생들에게 일왕이 초인간적으로 군림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와 다른 일화도 있다. 1941년 4월 동래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배종훈은 부산학생항일의거(노다이 사건)로 동기생 임규호가 퇴학을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봉안전 정면 문 앞에 용변을 봤다. 평소 일제의 봉안전 참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였다. 다음 날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그는 일본 경찰에 구속돼 불경죄로 1년 6개월의 실형까지 살아야 했다. 2019년 그는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았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그해 12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도지령’에 따라 봉안전 폐지가 결정되었다. 일왕의 초상화는 소각되었고 구조물은 대부분 해체되었다. 일본에서도 1946년 4월 봉안전 폐지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광복 직후 1945년 8월 16일부터 8일 동안 파괴·방화된 신사와 봉안전이 136건에 달했다는 기사도 있다. 일제 식민통치의 제일선이었던 경찰관서 습격(149건) 다음으로 많았다.       

광복 직전 공립국민학교와 중등학교를 포함해 4천 개교였음을 참작한다면, 수백 개의 학교에 봉안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광복 직후 모두 철거되었고, 현재 봉안전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몇 곳에 불과하다. 목포에 있던 봉안전은 1996년 8월 철거되었고 터만 남았다. 이외에 앞서 언급한 전주초등학교와 전주풍남초등학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를 일제 잔재라고만 여겨, 간혹 신문에 ‘버젓이 남아 있다’라는 투로 보도되곤 한다. 철거되어야만 할 대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어린 학생들에게 일제의 잔악상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역사 교육의 현장이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에 ‘봉안전’이 있었던 곳이며, 왜 이를 설치했고 철거했는지를 분명하게 알리는 안내문을 우선 설치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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