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 대표 48인으로 3·1운동에 참가하고 

신간회에 헌신한 강기덕

이달의 독립운동가<BR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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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공판 시작되는 독립당 수령 48인」, 『동아일보』(1920. 7. 12.)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강기덕은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대표로 3·1운동에 앞장섰다.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여 3·1운동을 준비하고,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 등을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들이 만세운동을 탄압하면서 현장에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고향 원산·덕원 일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온 강기덕은 원산·덕원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원산교풍회*를 조직하여 폐습** 철폐에 앞장서고, 8월에는 함남도민대회를 개최하여 지역민의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에 힘썼다. 1926년에는 덕원청년동맹 창립에 적극 참여하여 농촌문화 향상을 위한 순회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다시 한번 옥고를 치러야 했다.


*  원산교풍회(元山矯風會):1923년 강기덕 등 원산 지도자들이 관혼상제로 인한 사치 배격 등을 내세우며  조직한 단체

 ** 폐습(弊習):폐해가 많은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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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어제 만기 출옥한 강기덕 씨」『동아일보』(1921. 11. 10.) /「소위 치안 방해로 6개월 징역」, 『신한민보』(1926. 11. 11.) / 

                                                                         강기덕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1926)_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간회에서 민족협동전선 운동에 참여하다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온 강기덕은 1927년 창립된 신간회에 참여하여 원산지회 설립 준비위원 등을 맡아 힘을 보탰다. 함남기자연맹에도 소속되어 언론 자유를 위해 힘쓰다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출옥 후 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 활동을 이끌었다. 신간회 해소 후 1933년 원산노동조합의 재건을 적극 추진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던 중 네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거듭된 옥고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0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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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원산지회 회원들(좌) / 신간회 강령(1927)(우)


 

“百轉百起(백전백기)”

백번 넘어져도 백번 일어난다

강기덕 「百轉百起」, 『삼천리』(193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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