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사적지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민족운동 현장

독립운동 사적지<BR />

정리 편집실


해외 민족유일당운동과 짝을 이뤄 출범한 신간회(新幹會)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제휴로 성립한 좌우합작의 민족협동 전선이자, 국내·외 약 140개 지회에 3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일제하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단체였다.민족협동전선 신간회 결성은 1926년 12월 홍명희와 조선일보사 간부 신석우·안재홍의 회합을 통해 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홍명희·권동진·신석우 등은 1927년 1월 19일 조선일보계·기독교계·천도교 구파·불교계·사회주의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발기인을 구성하고, 일제의 자치론을 앞세운 민족분열 공작에 맞서 ‘정치·경제적 각성’·‘공고한 단결’·‘기회주의의 일체 부인’ 등을 3대 강령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 제3차 조선공산당의 표현단체였던 정우회가 2월 1일 통일된 정치전선의 조직을 제창하며 해체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청년회 신파와 물산장려회 계열의 좌우합작으로 발족한 조선민흥회 또한 2월 11일 신간회와의 합동을 결의함에 따라, 2월 15일 종로 중앙YMCA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는 명실상부한 민족협동전선의 출범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간회 본부는 창립 직후부터 일제의 탄압에 부딪쳐 당초 목표했던 민족적 정치투쟁을 벌이지 못했으나, 지회 차원에서 지역 사회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창립본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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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창립본부 터 진입로(좌) / 신간회 창립본부 터 정면(우)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18길 6-8 

위치 고증 : 조지훈의 글에 ‘신간회 회관은 지금 관수동(현재 국일관 부근) 이갑수 저택 사랑채를 얻어 회무를 집행하였고, 그 후에는 종로3가 현 파출소 뒤편으로 옮겼다가, 허헌이 위원장이 된 후로는 종로2가 덕원빌딩 2층으로 이전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1927년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을 통해 추적해 보면 李用洙(李甲洙의 오기로 보임)의 소유지로 나오는 관수동 143번지, 대지 413평의 저택이 그 장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2년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대회 이후 일제의 집회 불허로 정기 전체 대회조차 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본부 차원의 이렇다 할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1929년 6월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회장-간사제를 중앙집행위원제로 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허헌을 선임하였다. 복대표대회를 통해 창립 당시에 간부 다수가 교체되고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간부진으로 대거 진출한 가운데, 출범한 허헌 집행부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합법 단체라는 한계로 유보되었던 당초의 ‘민족적 정치투쟁’을 모색하였다.             

이 무렵 회관은 탑골공원 앞 큰길 건너편에 위치한 덕원빌딩 2층이었는데,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던 중 허헌을 비롯한 간부 44명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면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이후 새로 구성된 김병로 집행부가 합법운동 노선을 고수하자, 때마침 코민테른의 방침이 좌편향의 계급 노선으로 선회하는 속에서 지회를 중심으로 해소론이 확산되어 1931년 5월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의 해소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신간회 운동은 비록 4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된 이래 처음으로 전개된 민족협동 전선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신간회 본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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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본부 터(좌) / 신간회 본부 터 표지석(우)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 104 

위치 고증 : 『경성편람』 사회단체 편에 해당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1912년 경성부 종로2정목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옛 45번지가 현 48번지로 편입된 것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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