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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서막을 연 2·8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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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식민지 본국으로서 재일 조선인에게는 생존의 땅이자 투쟁의 심장부였다. 재일 조선인은 만주나 노령 또는 미주로 건너간 동포들과 이주 목적은 물론 출신 지역과 경제적 상황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른바 2·8독립선언이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에 결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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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의 주역들

민족 지성으로서 재일 유학생

한국 근대사에서 학생은 중산층으로서 민족지성의 대표였다. 국내의 열악한 고등교육 상황은 외국 유학을 촉발하였고, 먼저 근대를 수용한 일본이야말로 가장 선호하는 대상지였다. 유학생 도일의 역사는 1881년 유길준이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윤치호가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며 시작하였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유학생이 급증하여, 1909년 최고조에 달하다가, 1910년대 전반기에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경술국치로 인한 항일의식의 고조와 일제의 유학 억제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학생들의 도일은 1942년 윤동주가 「참회록(懺悔錄)」을 짓고 도일했듯이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 단체는 1895년 4월 결성된 대조선일본유학생친목회, 같은 해 9월 결성된 제국청년회였다. 단체의 목적은 대부분 관비 유학생이 주축이었고, 학생 수도 많지 않을 때여서 유학생의 친목 도모 위주였다. 재일 유학생 최초의 반일 활동은, 1905년 12월 교장의 조선인 유학생 비하 발언에 분개하여 도쿄부립제1중학교 유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교’였다. 이는 을사늑약 직후 정치적 분위기와 유학생의 동향을 알려준다.을사늑약을 전후로 자비 유학생이 증가하여 여러 대학에 재학생이 늘어났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1907년 ‘유학생 규정’을 만들고 감독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유학생 단체는 초기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태극학회와 대한유학생회 등 단체는 을사늑약 이후 망국으로 치닫는 조국 현실에 직면하여 반일의 기운이 더욱 높아갔다. 1907년 3월 발생한 이른바 ‘와세다대학 모의국회사건’은 식민지화 과정에 있던 대한제국을 두고 한일 학생 간 인식 충돌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개입할 정도로 일제를 긴장하게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주춤했던 일본 유학생의 증가는 191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식민지 지배하의 열악한 고등교육 환경은 기초 학문과 순수 학문 연마를 갈망하던 지성인에게 일본 유학을 선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1910년대 재일 유학생들은 이전 유학생들과는 의식이 달랐다. 단순한 근대 신학문 수용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민족적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학생학우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였고, 『학지광(學之光)』 같은 기관지를 발행하며 각종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졌다. 상당수 유학생들은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당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를 풍미한 ‘대정데모크라시’나 ‘아나키즘’과 같은 신사조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운동의 전위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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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일본 유학생 친목회(1896. 1. 6.)(좌) / 태극학회의 『태극학보』 1호(우)


2·8독립선언의 전개

1919년 1월 6일, 200여 명의 유학생들이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일제는 재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학우회, 조선학회 등 3개 유학생 단체를 ‘주의를 요하는 배일 단체’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이날의 모임은 학우회가 주관하였다. 연사로 나선 윤창석·김상덕·전영택 등은 현재 정세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 동포들도 실행에 나섰으니 유학생들도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독립선언을 위한 임시 실행위원을 선임하였다. 실행위원은 일부가 교체되었고, 최종적으로 최팔용·이종근·김도연·송계백·이광수·최근우·김철수·김상덕·백관수·서춘·윤창석 등 11인으로 확정되었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독립선언서 등을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1월 말, 송계백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와 최린과 현상윤을 만났다. 2월 초에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는 영국·미국·프랑스 3국에 독립선언을 타전하고, 『차이나 프레스』 등에 게재하였다. 독립선언서는 백관수의 지도로 10여 명의 학생이 펜으로 작성하여 등사하였다. 송계백이 국내에서 활자를 갖고 왔으나 여의치 않았기에 등사한 것이다. 조선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최팔용이 인쇄소에 부탁하여 1,000부를 인쇄하였다. 운동 자금은 정노식이 전답을 팔아 장만한 돈을 송계백을 통해 보내왔다. 국내에서 최남선을 통해 2월 8일 독립선언을 결행하는 것이 너무 빠르다는 의견 제시가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학생들이 정기총회 날짜에 맞추고자 한 자체 판단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유학생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지하고 윤창석 등을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그러나 독립선언은 2월 8일 오후 2시에 결행되었다.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사회를 맡은 최팔용이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어 역사적인 ‘2·8독립선언’을 거행하였다.        

순서에 의해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청년회관을 포위하고 있던 정·사복 일본 경찰이 주도 학생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실행위원 11명 중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와 피신한 최근우를 제외한 9명 등 27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도쿄지방재판소에 기소되어 금고 7개월 반에서 9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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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도쿄유학생학우회 육상운동회(1917. 4. 8.)


독립선언의 선구 「선언서」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격문과 독립선언서, 청원서 등을 작성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와 의회, 서구 열강 국가에 보내는 것도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1919년은 독립선언의 해였다. 의병전쟁 이래 여러 형태의 격문과 선언의 발표가 있었으나, 독립을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선언한 시초는 2·8독립선언서였다.       

독립선언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민족 대표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선언서, 간도거류조선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포고문, 길림에서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가장 선구적이고 순수 학생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재일유학생들의 선언서는 의미가 크다.        

2·8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는 시작과 말미에서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류가 ‘독립을 선언’한 반면, 재일유학생들의 선언서는 독립을 꼭 이룰 것을 선언한 점에서 차별적이다. 즉, 당장 독립을 이룰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이뤄내고야 만다는 젊은 지성의 현실주의에 기초한 각오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서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의 사기성과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10년간의 학정을 소상하게 고발하고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웠던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도 식민통치를 비판하였다. 즉, 러시아와 중국이 우리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였고, 국제연맹이 생겼으므로 강제병합 ‘최대 이유’가 소멸되었으니,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유를 추구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일본이 응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최후의 1인까지’ 영원한 ‘혈전’을 펼치겠다고 선포하였다.선언서는 본문에 이어 ①독립 주장, ②조선민족대회 소집 요구, ③민족자결주의 적용 요구, ④영원한 혈전 선포 등 4개 항의 결의문을 덧붙였다. 말미에 결의문을 덧붙이는 형태는 이후 다른 지역 독립선언서의 선행적 예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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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좌) / 2·8독립선언 장소, 도쿄 YMCA(우)

2·8독립선언의 의의

1919년 2월 8일,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결행한 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첫째 2·8독립선언은 거족적인 3·1운동의 서막이었고, 국내외 동포사회의 독립선언을 선도하였다. 유학생들은 국내의 종교 지도자는 물론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며 독립운동을 추동한 것이다.         

둘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은 이후 재일 한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유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며 단순한 지식층의 문필활동을 뛰어넘어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셋째, 유학생의 독립선언은 학생독립운동사에서 새 장을 열었다. 이전에도 몇몇 학생 단체가 있었으나, 친목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일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있었으나, 일시적이거나 비조직적이었다. 재일유학생들의 과감하고 진보적 활동은 학생층을 독립운동의 전위부대로 성장케 하여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발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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