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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의 주역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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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2·8독립선언은 재일 유학생으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른바 유학생 대표 가운데 실행위원으로 선임된 11명의 향후 추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약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명 가운데 최팔용·송계백·김상덕은 독립장, 윤창석·김도연·이종근·김철수는 애국장에 서훈되었으니 7명은 독립유공자이다. 서춘은 서훈되었다가 취소되었고, 이광수·최근우·백관수는 아예 서훈되지 못하였다. 2·8독립선언 이후 이들의 역사적 평가가 갈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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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으로 체포되었다가 출옥 후 촬영한 기념사진(하단 좌측부터 최팔용·백관수·송계백·서춘)


요절한 최팔용과 송계백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가운데 최팔용은 운동의 준비를 총괄하였고, 송계백은 국내에 다녀오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팔용과 송계백은 와세다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은 감시 대상(요시찰) 조선인을 갑호와 을호로 나눠 감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감시 대상 갑호였다.        

1919년 1월, 실행위원이 선임되자 일제의 감시와 미행이 더욱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2·8독립선언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경찰을 따돌리는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중순 청년회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팔용과 송계백은 운동에 대해 소극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일제의 경계를 느슨하게 유도하였다고 한다. 이날 강경 발언을 한 윤창석과 김상덕 등에게는 밀정이 따라붙었다고 하니, 발언 내용이 일제에 누설될 것을 알고 전술적으로 취한 언동이었다.      

최팔용은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국장을 맡으며, 재일 유학생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2·8독립선언 당일에는 사회로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개칭하고,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이날 붙잡힌 그는 1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고초를 치른 뒤 함경남도 홍원으로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정양하다가 서울로 이사하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 생활하다가 1922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계백은 1월 하순 완성된 선언서를 모자 속 안감에 숨겨서 국내로 들어와 보성중학교 재학 당시 은사였던 최린을 만났다. 그가 모자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건네자 최린은 청년들의 불타는 애국심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송진우도 만나 선언서를 전하고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렸다. 이때 송계백은 선언서 인쇄를 위해 서울에서 활자를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비화도 전해진다. 물론 여의치 않아 선언서를 인쇄하지 못해 활자를 활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정노식으로부터 받아 온 돈은 긴요한 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2월 8일 붙잡힌 그는  7개월 보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4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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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최팔용, 송계백, 김상덕


반민특위에서 만난 김상덕과 이광수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김상덕과 이광수는 1949년 ‘반민특위’에서 해후하였다. 2·8독립선언으로부터 꼭 30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이었고,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자의 처지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한 광경이었을 것이다.김상덕은 2·8독립선언으로 붙잡혀 7개월 보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6년부터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33년 다시 관내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참여하며 줄곧 김원봉과 행보를 함께 하였다.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며, 광복 후 조국 건설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한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 시기 그에게 있어서 지상 과제는 조국의 독립이었고, 그 길은 통합을 통해 혁명을 추구한 노선이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되었고, 1948년 고향 고령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친일파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될 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이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까닭은 2·8독립선언 이후 독립운동으로 초지일관한 전력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김상덕은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친일파의 공적이 되어 암살  1호 대상이었다. 반민특위 활동은 친일파 청산 의지가 없었던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친일파의 준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는 6·25 때 납북되었고, 그 자식들은 ‘빨갱이’의 멍에를 쓴 채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0년에서야 서훈된 것은 분단과 이념의 대립이 빚은 어두운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담당하고, 영문과 일문 번역도 담당하였다. 1월 하순경 선언서 작성을 마치고 최팔용의 권유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참여하여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과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귀국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로 인해 ‘밀정’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 『개벽』지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의 발표는 변절의 신호탄이었고, 1938년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며 노골적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9년 2월 이광수는 박흥식에 이어 반민특위 제2호 구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3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고, 8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는 자서전 『나의 고백』에서 자신은 민족을 위해 부득이 표면상의 친일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끝까지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았다.        

반민특위 법정에서 김상덕과 이광수가 대면하여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김상덕은 이승만이 파격적으로 위원장 관사를 방문하여 친일파 처리를 적당히 해달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2·8독립선언 당시의 동지인 이광수가 구속된 것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정작 그가 마음 아파했던 것은 처절하게 훼절한 이광수 개인이 아니라, 식민지 삶을 강요당했던 민족의 불행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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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이광수, 백관수, 최근우, 서춘


친일 행적 논란자들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백관수와 최근우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 을호였다.    

백관수는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하였다. 일설에는 선언서 문체를 근거로 백관수가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관수는 자신이 두세 번 수정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이광수가 기초하고 백관수가 수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그는 선언서의 인쇄를 위해 YMCA 등사기를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2월 8일 독립선언식장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붙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상무취체역 겸 영업국장이 되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고, 1940년 폐간에 항의하다가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6·25 때 납북되었고, 196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우는 2·8독립선언 때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도피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그는 2월 28일 후쿠오카현 모지항을 출발하여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여운형이 일본에 갈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1921년 유럽으로 건너가 공부하였고 1928년 귀국하여 사회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근로인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0년 사회당을 결성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들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한 것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백관수는 1937년 이후 시국강연반 강사,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 상담역, 조선병지원제도 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의 행적이 문제가 되었다. 최근우는 친일 단체인 만주국 협화회 참여 행적이 문제가 되었다. 이광수와 함께 친일 행적으로 인해 3명이 서훈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른 시기인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나중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사례도 있다. 서춘이 그 장본인이다. 그는 2·8독립선언으로 붙잡혀 9개월 금고형 처분을 받고 출옥 후 교토제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매일신보』 등 각종 친일 단체에 참가하여 반민족 행위를 자행하였다. 결국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대전현충원에 있던 묘도 이장하였다.    

2·8독립선언의 주역들! 당시 그들의 민족적 의기는 일치하여 역사적인 순간을 일궈냈으나, 이후 행보는 같지 않았다. 그들의 다른 삶은 어떤 것이 정의로운 삶이며 민족적 양심과 합치하는가를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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