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김성권과 강혜원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13년 12월 9일 강혜원과 김성권은 결혼했다. 결혼 이후 강혜원은 남편의 성을 따서 김혜원으로 불렸다. 남편 김성권은 상점 서기 등으로 일하고 강혜원은 바느질로 생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독립운동 활동의 폭을 점차 넓혀나갔다. 강혜원은 1982년 5월 31일 사망해 로스앤젤레스에 묻혔으나, 2016년 김성권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대전현충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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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사진


하와이 노동 이민에서 미주 본토로 근거지를 옮기다

강혜원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부에서 아버지 강익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가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술과 기생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난봉꾼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남동생 강영승 부부와 어머니 등 가족과 함께 1905년 5월 도릭선편을 타고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이후 가파올라 사탕수수농장과 에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노동과 병행하여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니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1912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북미 중가주 롬폭(Lompoc)에 거주하는 김성권과 약혼을 하고, 1913년 10월에 북미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이주해 목사 이대위 의 주례로 12월 9일 결혼한 뒤 다뉴바(Dinuba)에 정착하였다. 이후로 남편의 성을 따서 김혜원(SARA Kim)으로 불렸다. 다른 이름은 김혜원(金惠源, 金惠園, 金惠媛), 김혜숙(金惠淑) 등이 있다. 김성권과 사이에는 3형제를 두었다.       

결혼 후 다뉴바에 정착한 동생 강영승의 아내이자 자신의 올케인 강원신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한성선·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였다. 현지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5월 18일에는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켰다.       

8월 2일에 강혜원은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 내 각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회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했다. 그녀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다.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를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활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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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그녀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서 1924년까지 직무를 수행하며 송금한 금액 내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1,000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00달러, 상하이 독립신문사에 300달러, 구미위원부에 군축선전비로 500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 구입비 500달러, 간도 동포 기근구제금 67달러, 중국 장제스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하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마탄사스 지역 한인구제금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 55달러, 황은순고아원 58달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1922년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단원이 되었다. 1930년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40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원조했다. 또한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쑹메이링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냈다.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한편 미국 전시공채를 매입하는 등 양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도 노력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그녀는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참석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 지원 확보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광복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82년 5월 31일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2016년 11월 16일 순국한 지 56년만(강혜원은 34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혜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김성권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여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민길에 올랐다. 오하우 에와 농장에서 어려운 생계에도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 주필로 필봉을 휘날렸다. 에와 친목회는 1905년 5월 3일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10여 명이 모여 만든 독립운동 단체였다. 20세기 초에 하와이로 이주한 김성권을 비롯한 정원명·윤병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은 주요 인물들이었다. 창립 1주년에 즈음하여 기관지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규섭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지역의 한인들은 기독교인·학생·전직 군인·머슴·노동자 등이 혼합된 집단으로 65%가 문맹자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문맹 퇴치와 한인들의 단결만이 국권 회복에 밑거름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회원 결속과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활동을 병행했다.         

1907년 3월부터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기관인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하는 산파역을 맡았다. 1908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안창호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 찬성원으로 가입했다. 한편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 자격으로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에 참석하는 등 이듬해   2월에는 미주한인의 최고 통일기관인 국민회를 탄생시켰다.그는 1931년부터 1938년에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기관지 『독립(1943년)』을 창간하는 등 광복 때까지 민족운동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6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주최로 김성권·변준호·최능익·박상엽 등 18명이 발기하여 독립신문사를 만들어 국문과 영문 4면으로 발간하였다. 국문기사는 순한글로 사진식자 조판을 했다. 제4면은 영문판으로 매주 수요일 발행하는 주간지였다. 논조는 공산주의 선전에 주력하였으며,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우리나라와 자유진영을 비난하고 북한과 공산진영에 찬사를 보냈다. 창간 이래 1955년까지 12년 동안 계속 발행되다 미국 정부의 주목을 받아 폐간되고 말았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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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주년 기념식(다뉴바)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둥지를 틀다

한국인에게 하와이는 어떠한 이미지로 다가올까? 세계적인 휴양지로서 와이키키(Waikiki, 용솟음치는 물) 해변의 수정처럼 고운 백사장을 연상하리라. 각국에서 모여든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 황홀한 밤 풍경 등은 낭만과 환상이 어울려진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외형과 달리 이면에는 한민족의 한숨과 내일을 향한 꿈이 공존하는 역사적 무대였다.       

하와이와 한국인의 공식적인 첫 만남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제국은 서구 열강과 일제의 무자비한 침략에 저항은 고사하고 무기력한 ‘만신창이’였다. 이에 비례하여 민초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보다 열악한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이때 ‘지상천국’ 하와이에서 노동이민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과 금의환향하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머나먼 미지로 향한 사람은 102명이나 되었다.          

황마리아는 1905년 4월 장성한 딸과 아들을 동반한 가족이민 대열에 섰다. 딸 강혜원은 19세, 아들 강영승은 17세였다. 당시 가족이민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노동이민자 대부분은 독신으로 한국 이민사에서 ‘사진신부’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주요한 배경이었다. 이국땅에서 낯선 자연환경과 농장주와 언어마저 제대로 소통되지 않아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고달픈 삶이 시작되었다.       

온종일 농장에서 노동을 해도 만성적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사였다. 열악한 생활환경은 사무치도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냈다. 애틋한 감정은 친지들의 안부와 더불어 독립국가가 왜 중요한 지를 절감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황마리아는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적응하면서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자녀 교육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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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여자애국단 원로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1910년 9월에는 일제의 강제병합 소식을 접했다. “왜놈이나 쪽발이”라고 멸시하던 일본놈들의 세상이 한반도에 시작되는 천인공노할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조국은 역사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인사회 권익을 위해 조직되었던 각종 계몽단체는 조국 광복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맞았다. 한인 여성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황마리아는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했다. 상호부조를 위한 여성단체도 곳곳에서 조직되는 등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은 곧바로 한인사회에 전해졌다.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마리아는 곧바로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 대표를 소집하여 공동대회를 열었다. 회원들은 3월 29일 제2차 대회에서 향후 행동 방침을 결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인 부녀를 규합하고 부녀사회의 운동 역량을 집중한다. 둘째, 독립운동에 대해 부녀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에 봉사한다.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과 재난 동포 구제에 노력한다. 셋째,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 방침에 대한인국민회 지도 방침에 따른다. 이 결의안에 따라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가 조직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 육성에 앞장서다

황마리아의 활동 중 주목할 부분은 조국 광복에 투신할 여성독립운동가 양성이었다. 심영신, 딸 강혜원, 전수산, 박신애, 며느리 강원신 등은 하와이를 대표하는 여성운동가들이다. 이들은 황마리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많은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이민 1.5~2세대였다. 아낙네의 가치관에 안주하거나 험난한 파도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 당당한 한국 근대사 주인공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이들은 미주한인사회를 주도하는 동시에 ‘민족 정체성’ 정립을 위해 한글 교육에도 힘썼다. 오늘날 한인사회는 이들의 노력으로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017년 3월 황마리아는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딸이나 사위, 며느리보다 늦게 서훈되어 아쉬움도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도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역사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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