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발자취

자인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독립의 발자취<BR />

글 편집실



황기식은 경북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이자 근대 서화가이다. 사실 그는 1919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고향 경산 자인에서 만세운동을 이끈 당사자이기도 하다. 향토사학자와 서화가라는 명성에 가려져 그가 펼친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작고 5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삶을 조명하는 〈경산의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전시가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황종현 학예사가 전하는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한 황기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alt

황기식


Q. 황기식 선생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1905년 경산 자인에서 태어난 황기식은 사군자·화훼·산수·기명절지·풍속 등의 그림에 능통한 근대 서화가입니다. 또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가 연상되는 ‘희재(羲齋)’를 아호로 삼은 그는 뛰어난 서예 작품을 남긴 서예가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1932년 자인의 산천·역사·문화·행정 등을 집대성한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를 편찬한 향토사학자입니다. 이렇듯 황기식의 업적은 다방면으로 인정받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흔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19년 당시 고등학생 2학년이었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배들에게 전달받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고향인 자인으로 가져와 이른바 3·18자인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경찰에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 보름 동안 수감되어 옥고를 겪은 독립운동가입니다.


Q. 전시를 기획한 취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지난해 황기식의 작고 50주기를 맞아 민족운동가, 향토사학자, 서학자 등으로 치열한 삶을 영위한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크게 3개 주제로 나눠 ‘독립운동가 황기식’, ‘향토사학자 황기식’, ‘근대 서화가 황기식’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또 그의 작품과 유품 180여 점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황기식이라는 인물을 알리는 데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 특히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뒷받침하는 형사사건부와 집행원부를 함께 소개해 감동을 선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것이 공립박물관의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Q. 선생의 작품을 접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황기식의 대표작인 ‘기명절지도’와 ‘금강산도’, ‘사군자’, ‘풍속화’ 등이 처음으로 고향에서 전시되어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아트로 재탄생한 금강산도는 분단 시기에 금강산을 그리며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한 그의 바람이 잘 드러나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더불어 1956년 5월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만들어 사용했던 태극기를 마주한 관람객들의 표정은 남달랐습니다. 태극기는 우리의 고난과 희망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지,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광복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alt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_황준명 소장


Q.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번 전시는 황기식의 막내딸인 황인혜, 손자 황준명 씨를 비롯한 유가족과 김영태 소헌미술관장 등 개인 소장자들의 도움으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사학, 한문학, 국문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황기식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여 소중한 원고를 작성해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큰 어려움 없이 전시를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손자 황준명 씨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 황기식의 작품과 유품 129점을 기증해주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작품이 고향 자인이 훤히 보이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 소장되기를 희망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1969년 4월 대구 공화회관에서 개최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황기식의 전시회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방명록 표지에 ‘군현필지(群賢畢至)’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 현인들이 모두 모였다’는 뜻을 가진 이 글귀는 왕희지의 대표작인 『난정서(蘭亭序)』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는 전시회에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붙인 것입니다.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가 사랑한 고향 자인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두 번째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려 모인 관람객들을 보며 이제야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울러 선생처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그들의 역사적 자취를 기억하는 일이 꾸준히 시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기식(黃基式, 1905~1971) 한평생 조국애를 그리다


고향 자인에서 펼친 3·18자인만세운동

황기식은 1918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보, 계성학교(현 계성고), 신명학교(현 신명고) 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선배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 고향 자인으로 운반하여, 자신의 집 앞 개울가 홰나무 아래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3·18자인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19년 3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다행히 4월 4일 대구지검이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내려 석방되었다.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황기식은 대구고보에서 퇴학을 당했으며, 1924년 서울 동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자인청년회를 조직하여 1927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교를 열어 계몽운동을 펼쳤다.


alt

 대구고보 시절 황기식(1919)(좌)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1932)_박의순 소장 제공(우)


기록으로 역사를 지킨 『자인현읍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에 진학한 황기식은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인해 고향 자인으로 돌아와 한학과 서화 등 전통 학문을 익혔다. 한학을 공부한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자인현읍지』이다. 『자인현읍지』는 1932년 황기식이 대구소천인쇄소에서 신활자로 출판한 것으로, 각 고을의 산천·역사·문화·경제·정치·행정·군사 등을 기록한 지리지를 말한다. 1915년 변상묵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전해오던 ‘자인현읍지’와 ‘읍사례(邑事例)’를 기초로 새롭게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2년 신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연혁·지리·인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한다면 훗날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 역사를 다시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당시 20대였던 황기식은 국망의 시기에 고향을 기록함으로써 역사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현재 『자인현읍지』는 매우 선구적이고 충실한 한국 근대기의 지방지로 평가받고 있다.


alt

금강산도(金剛山圖)_리홍재 소장(좌) / 청년 황기식(우)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 〈금강산도〉  

근현대기 경북·대구 작가로서는 드물게 금강산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의미를 지닌다.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민족 예술의 한 원천이다. 다만 20세기 후반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금강산 그림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그가 금강산을 그린 1950~1960년대는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금강산을 추억할 뿐이었다. 황기식의 〈금강산도〉는 사생이 아닌 모작(摹作)이다. 모(摹), 임(臨), 방(倣)은 고전을 손으로 깨달아 추체험하는 학습이자 법고창신의 한 방식이다. 그는 분단 시기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금강산을 그림으로써 국토의 통일을 염원했다.


〈경산의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전(展)〉

2022. 8. 28(일) 까지

*장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공원로 59

*문의 : 053-804-7320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