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미국의 원조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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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봉중(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 공표와 함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미합중국은 근대 최초의 공화정을 수립했다. 미국인들은 독립의 영웅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추앙한다. 독립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진정한 건국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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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페인


독립선언문 선포일이 미국 최대의 국경일

독립기념일은 미국 최대의 국경일이다. 매년 7월 4일 미국인들은 독립기념일 축제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전날 밤 불꽃놀이로 포문을 열고, 당일에는 퍼레이드 등 각종 이벤트가 열린다. 큰 도시 작은 도시 할 것 없이 미국 전체가 축제에 휩싸인다. 독립기념일은 오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통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들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독립기념일을 국가 최대의 국경일로 지킬까? 현재 미국의 위상을 생각할 때 독립기념일이 왜 미국 최대의 국경일인지 조금 의아하다. 영국 식민 지배 하의 북아메리카 상황은 훗날의 다른 식민지배와 비교하면 그렇게 암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영국의 신민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컸다. 우여곡절 끝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모국과의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전쟁의 승리로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서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날은 일종의 승전 기념일이며 해방 기념일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789년 4월 30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취임하면서 미합중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미국인이 아닌, 미국 건국의 아버지

여느 굵직한 역사적 사건처럼 역사가들은 미국 독립혁명의 기원에 관심이 높다. 크게는 사건과 인물이 그 중심에 있다. 사건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1773년 보스턴차사건(Boston Tea Party)이 결정적이었다. 소수의 ‘독립투사’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선박에 잠입해서 상당량의 차 꾸러미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의회는 발끈했다. 그동안 북아메리카 상황을 관망하면서 비교적 온건하고도 유연하게 대처하던 영국 의회는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식민지인들에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식민지인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고, 곳곳에서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      

독립으로 가는 길목에 누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보통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불리는 인물의 묶음으로 독립의 영웅을 기린다. 대통령을 지냈던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해서 알렉산더 해밀턴, 벤자민 프랭클린, 존 제이, 사무엘 애덤스와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독립의 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을 꼽을 수 있다. 토마스 페인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공표되기 불가 2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은 보스턴차사건의 후폭풍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련의 ‘강제법’으로 식민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영국 의회와 식민지인들과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완전한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774년 9월 초에 최초의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13개의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서 사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토마스 페인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 불과 한 달 전의 상황이었다.        

토마스 페인은 영국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신분도 미천했고, 이런저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급 관료를 지내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토마스 페인은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한 의견을 진솔하게 피력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미국으로 건너오기 2년 전, 그가 몸담고 있었던 세무 공무원들의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는 소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신분제와 전제왕권에 불만이었으며, 계몽사상에 근거한 평등한 사회가 시대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상식과 독립의 당위성

미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그는 곧바로 신문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독립이냐 영국과의 타협이냐를 놓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토마스 페인은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세울 수 있는 최적의 국가이기에, 영국의 전제정권에서 벗어나 공화국을 세워야 하는 시대적 부름에 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미국이 독립해서 중립국으로 유럽의 강국들과 자유롭게 외교 및 상업적 교류를 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1776년 1월에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페인의 팸플릿이다.      

‘상식’의 영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47쪽짜리 이 팸플릿은 거리에서나 주막에서 주요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남부 조지아의 사바나에서부터 북쪽 뉴햄프셔의 포츠머스에 이르기까지 ‘상식’의 메시지는 순식간에 북아메리카 전체로 확산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무려 50만 권이 팔렸다. 당시로는 엄청난 판매 부수였다. 미국 역사상 인구 대비 최대 판매량이었다.       

무엇보다도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상식’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모국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른다는 것에 부정적이거나 부담감이 컸다. 그들은 여전히 영국 의회가 한발 물러서서 협상 테이블로 나와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런데 ‘상식’은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고 말았다. 완전한 독립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공표되었다. 존 애덤스는 “토마스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했다.       

어느 역사가가 얘기했듯이 미국인들은 ‘토마스 페인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7년간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이 독립할 수 있었지만, 독립으로 가야 하는 미국의 숙명을 역설했던 토마스 페인의 사상이 미국을 진정한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의 사상은 그 시대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미국은 전제정권에 찌든 유럽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공화국 건설이 미국의 숙명”임을 외친 토마스 페인의 사상은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정신에 남아있었다. 적어도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절대적인 원칙이 되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누구로부터 독립한 날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독립했는가를 상기하는 국경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서도 특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평등을 비롯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주창했다. 그런데 그날이 우리의 최대 국경일로 지켜지지 않아서 안타깝다. 이제 대한민국도 우리의 미래, 특히 통일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체성을 상기해야 한다. 그 시작점이 3·1절에 대한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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