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신정’이란 말을 

쓰면 안 되는 이유

INPUT SUBJECT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2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한다. 달력을 보면 1월 1일은 하나같이 ‘신정’이라 쓰여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는 ‘신정’을 “태양력에 따른 설날로 전통적인 세시풍속인 음력설을 대체하기 위하여 도입된 명절”이라 풀이하고 있다. 신정이 음력설을 대체하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올바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음력설의 기원

우리가 양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후 우리의 오랜 전통인 명절 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력을 사용하기 전 우리는 으레 ‘음력 1월 1일’을 세수(歲首), 원단(元旦), 원조(元朝), 원일(元日)이라 하여, 새 옷으로 갈아입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냈으며 일가친척이나 웃어른들께 세배를 하였다. 이렇듯 국가에서 양력을 사용하기로 정했지만, 수천 년 내려온 우리 민족의 중요한 세시풍속 설을 바꾸지는 못했다. 더욱이 당시 사람들은 양력보다 음력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였다. 다만 양력 1월 1일은 새해 첫날이라 해서 ‘세수’, ‘원단’이라 바뀌었다.     

이런 가운데 『독립신문』 1899년 2월 15일자에 “대한 신민들이 양력으로 이왕 과셰들을 하고 또 음력으로 과셰들을 하니 한 세계에 두 번 과셰한다는 말은 과연 남이 붓그럽도다”라고 하여 이중과세(二重過歲)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음력설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1906년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제의 입김이 거세지고 일본처럼 양력설을 과세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났으며, 양력과 음력으로 ‘세수’를 구분하였다. 일부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보다는 양력 1월 1일을 ‘오쇼가츠(お正月)’라 하여 명절로 바꿨는데, 이를 따르려는 분위기도 있었다. 

천도교에서 창간한 신문 『만세보』는 1907년 1월 2일부터 사흘간 휴간했지만, 그해 2월 13일 ‘음력 세수’를 맞이하여 각 중앙 부처와 학교 및 점포는 국기를 게양하고 신년을 축하하였으며, 관리들은 경운궁 중화전에 나아 고종에게 하례하였다. 이후 며칠간 관청은 휴무하였고 학교는 휴학하였다. 하지만 1909년에 들어서면서 『대한매일신보』도 1월 2일부터 사흘 동안 휴간하였고 관공서는 음력 설 휴가를 일절 금지하였다. 그렇다 해도 1910년 음력설을 맞아 황족(皇族)들은 창덕궁의 순종 황제를, 경운궁의 고종 황제를 문안하였고 서민들 역시 그날을 즐겼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처음 맞는 1911년 새해 첫날을 ‘원조’, ‘원단’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총독부는 음력설에 대해 구정(舊正)이라 칭하며 폄훼하였다. 그렇다고 구정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회자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음력설은 ‘음력세수(陰曆歲首)’, ‘조선의 원단’, ‘구력 정월’, ‘구 원일’, ‘구력 원일(元日)’ 등으로 불렸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음력 신정’이라 쓰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설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음력설에 설빔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나 당시 풍경 사진을 싣고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라 소개하였다. 학교나 관공서는 며칠 동안 휴학·휴무하기도 하였다. 이날 사람들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떡국을 즐겨 먹었으며 세배하러 다니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널뛰기 및 척사(擲柶; 윷놀이) 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음력설을 지켜낸 역사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0년대에 들어서 음력설은 ‘구습이고 미개민족에 한한 일’이라며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등장하였고, 세계 공통의 양력을 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26년에는 ‘구력 정월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예전과 달리 음력 설날 관공서의 휴무는 폐지되었고 학생들 수업은 단축수업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인들에게는 음력설이 진짜 설이었다. 1925년 1월 1일자 신문에 ‘서울 북촌의 신정은 자못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느낌이 있다. ‘양력을 공용한 지 이미 수십 년 되었지만, 양력의 관념은 아직도 뇌리에 없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여전히 음력설에 맞춰 신춘음악대회·신춘가극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극장에 새로운 영화가 내걸렸고 축구 대회까지 개최되었다. 이에 신정은 공생활(公生活)의 ‘설’이오, 구정은 사생활의 ‘설’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친일 단체를 중심으로 ‘중요한 민족적 또는 민속적 기념일을 모두 태양력으로 환산·개정하여 단일 신년의 지킴을 철저히 기할 것’이라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신생활 차원에서 단일신년(單一新年)을 내세우며 신력을 채용하고 구력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심지어 ‘의식이 저열한 대다수 민중은 오직 통치적 위력 앞에서만 궤좌(跪坐; 무릎을 꿇음)’한다며 일제에 강압적인 탄압을 요구하거나, 조선민력(朝鮮民曆)을 폐지하고 음력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를 확장해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음력설을 탄압하였다. 1938년 1월 지방 군수에게 통첩 후 지방의 5만여 단체를 총동원하여 차례 및 세배 등을 양력 1월 1일에 실행토록 엄중히 단속하도록 했다. 그동안 음력설에 행하던 취인(取引) 결제도 신정에 하도록 강제하였다. 더욱이 그동안 관행처럼 행해졌던 학교나 관청의 조퇴를 엄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력설에 맞춰 인력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다. 1940년 전북 임실군 둔남면에서는 면직원을 총출동시켜 설 떡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기도 하였다. 급기야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군국주의 전쟁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1942년 2월에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이 음력설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었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 휴일로 정하였고, 1985년에 이르러서야 ‘구정’을 ‘민속의 날’로 바꿔 하루 공휴일로 지정했을 뿐이다. 그나마 설이 제자리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국민 대다수가 음력설을 지내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이중과세를 지적하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뒤 1989년 1월에 하루만 쉬던 음력설을 사흘 연휴로 개정하면서 명칭이 ‘설날’로 바뀌었고, 1999년부터 1월 1일은 하루만 쉬도록 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음력설의 풍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설’을 고집스럽고 꿋꿋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다만, 임인년(壬寅年) 새해 달력 첫날 ‘신정’이란 용어가 못내 아쉽다. 우리의 음력설은 지켜냈는데, 일제의 ‘신정’은 아직 청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2023년 첫날에는 ‘세수’, ‘원단’ 등 우리의 용어로 바뀌기를 희망하며, 올 한 해 검은 호랑이의 용맹한 기상으로 포효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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