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선 

주 하도리 해녀들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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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하도리 해녀들

19세기 중엽부터 일본인 어부는 제주도 연안으로 들어와 해산물을 남획하는 등 해녀들의 어로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에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호소하자 1920년 제주 유지*들은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해녀어업조합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인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임하면서 조합의 성격이 점차 어용화**되자 하도리 해녀들은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여성들이 전개한 제주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자 어민항쟁이었다. 


*  유지(有志)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

** 어용화(御用化)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 기관 등에 영합하여 행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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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제1회 졸업 기념사진(1931)_국가보훈처 제공(좌)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비(우)


해녀회로 단결한 하도리 해녀들, 해녀어업조합의 횡포에 맞서다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민족교육을 받으며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인식하게 된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이때 키운 항일 의식을 바탕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해녀회를 조직하여 1931년 6월부터 채취한 생산물의 가격을 강제로 낮추고 해산물 채취 금지 협박 등을 진행한 해녀어업조합을 규탄하는 항의서를 제출하고, 주변 마을 해녀들을 규합하는 활동 등에 앞장섰다. 활동이 점차 조직화되면서 1931년 12월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은 해녀 대표로 선출되어 직접 투쟁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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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해녀의 운명」, 『동아일보』 (1920. 4. 22.)(좌) / 「18개조 요구하며 300여 명 해녀 시위」 『조선일보』 (1932. 1. 14.)(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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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항일운동이 전개된 세화5일장터(좌) / 「해녀 삼백여 명, 다쿠지 제주도시에게 항의」, 『조선신문』 (1932. 1. 16.)(우)

10,000여 명의 제주 해녀들, 일제에 맞서 직접 투쟁을 전개하다

1932년 1월 7일 1차 시위운동을 전개한 하도리 해녀들은 해녀어업조합의 착취를 성토하며 구좌면사무소로 행진 후 면장에게 요구 조건 해결을 약속받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의 순시***가 있던 1월 12일, 제주 곳곳의 해녀 10,000여 명이 세화리 오일장에 결집하여 2차 시위를 전개하였다. 해녀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제주도사를 포위한 후 직접 협상하여 ‘일본 상인 배척’ 등 요구 조건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며칠 뒤 일제는 해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미결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03년 부춘화·김옥련에게 건국포장, 2005년 부덕량에게 건국포장을 추서·수여하였다.


***순시(巡視)돌아다니면서 사정을 살핌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일제에게 압박받고 

해녀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 뿐이야.

제주해녀항일운동 참여 동기에 대한 김옥련의 증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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