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명문가를 일군 

신건식과 오건해

아름다운 인연<BR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신건식과 오건해는 중매로 결혼하였으며, 신건식이 먼저 상하이로 망명 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오건해는 1926년경 딸 신순호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건식과 함께했다.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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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오건해, 딸 신순호, 신건식)


개화기에 중앙정계로 진출하다

신건식은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2길 4-24)에서 신용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환(桓)·두흥(斗興) 등이며 호는 삼강(三岡)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신성용을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하여 재지사족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형성했다. 지리적으로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위치하여 흔히 산동(山東) 신씨라고도 한다. 집안은 남인 계열로 영조대의 무신란 이후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에 의한 과감한 인재 등용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앙에 출사한 문중 인사들은 개화에 빨리 적응하는 등 문중에 신문화를 확산시켰다. 산동 문중의 유능한 청년들은 신학문 수학과 중앙정계에 대한 진출을 꿈꾸며 서울로 올라갔다. 대표적인 인물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신채호(申采浩, 1880~1936)·신흥우(申興雨, 1883~1959) 등이었다. 둘째 형 신규식은 고향에 문동학원·덕남사숙·산동학당 등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08년에는 문중 내 근대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를 조직하는 등 민족교육을 위한 든든한 밑거름을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건식도 YMCA에서 운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근대적인 사고를 갖춘 개화인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형 신규식은 상하이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둥지를 틀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초기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며, 동생 신동식도 향리에 남아 임시정부 충청북도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만 해도 12명에 달하니 가히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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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학원에서 신성모·신규식·신건식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신건식은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저장성 항저우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형이 주도하던 동제사와 대동보국단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신규식을 비롯해 일찍이 상하이로 진출하여 근거지를 확보한 박은식·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문일평·조성환 등이 민족운동을 위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동제사는 최전성기에 3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할 정도로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는 ‘동주공제(同丹共濟)’ 즉 ‘한마음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뜻으로, 표면적으로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임을 내걸었다. 실제로는 국권 회복 곧 독립국가 건설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동제사는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중국 내 각 지역, 구미와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포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에서 망명해 오는 청년들에게 강습소를 마련하여 중국어를 가르쳤다. 또한 중국이나 구미 등지로 유학을 주선하는 등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이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신건식은 박달학원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박달학원은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젊은 인재 양성에 혼신을 기울였다. 실제로 졸업생들은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맹활약했다. 1915년에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동보국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보국단은 ‘완전 평등’의 이상 세계를 이룩하려는 동양의 전통적 사상인 대동사상과 박은식이 창건한 대동교가 기본 이념이었다. 대동보국단에서 활동은 대종교 신자로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일제 탄압으로 대종교 총본사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형 신규식, 조완구·박찬익 등과 대종교 교회를 세워 민족주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단군이 지상에 내려온 지 216년 만에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념하는 날인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을 기념하는 행사도 거행했다. 대종교와 관련된 행사는 민족정신 보존과 항일운동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상하이에서 형과 같이 한 활동은 향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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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 체포 기사, 『매일신보』(1921. 11. 6.)


중국군 장교에서 임시정부 요인이 되다

신건식은 1921년 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로 몰래 들어와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상하이로 다시 돌아가던 중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낸 병보석이 허가되자, 서울에 머물며 동지들과 상하이로 탈출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망명 도중 다시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되었다. 1년 뒤 석방된 그는 3개월간 치료 후 마침내 다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군 중교(중령)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자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중국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자, 임시정부는 안정적인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신건식은 딸 신순호와 함께 배를 타고 우창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후난성 창사로 이동하였다. 1940년 충칭에 도착한 그는 시내에서 30km 떨어진 투차오(土橋) 한인촌에서 부인·딸 등과 함께 모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는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된 이후 1945년 광복될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부족한 재정 문제 해결에도 진력하였다. 2년 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특히 그해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에서 상임위원회 분과위원 제3과(재정예산결산)위원으로 맡은 일에 충실했다. 1945년 열린 제38회 임시의정원에서도 상임위원회 제3과(예산결산)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에서 1944년 3월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과 항일 독립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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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과 사돈 박찬익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살피다

오건해(吳健海, 1894. 2. 29~1963. 12. 25)는 중매로 신건식과 부부가 되었다. 고향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생활하다가 1926년경에야 남편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맡았다. 특히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이동녕과 사돈인 박찬익 등 임시정부 요인들 살림살이도 성심성의로 돌봤다.     

아울러 한국혁명여성동맹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 단체는 1940년 6월 16일 충칭에서 결성되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인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조국 독립을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1942년에는 한국독립당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가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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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의 묘


딸과 사위가 독립운동의 맥을 잇다

신건식과 오건해 부부의 독립운동 정신은 외동딸인 신순호에게로 이어졌다. 그녀는 7세에 일선(逸仙)소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윤봉길 의사 추도식을 참관했다. 중국인 교장의 “수억 중국인이 못했던 일을 2천 명의 한국 사람이 했다”는 추도사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신순호는 후일 독립운동가인 박영준의 아내가 되었다. 박영준은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박찬익의 아들이다. 신순호는 박영준과 함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결혼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영준이 17세 때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온 후 신순호의 집에 한동안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박찬익이 가족과 떨어져 투병 중일 때 신순호와 그녀의 어머니가 보살펴 줄 정도로 집안끼리도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윤봉길의 훙커우공원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충칭에 도착하였다. 8년여에 걸친 오랜 피난생활에서 벗어난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면서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무장 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당시 만주 독립군 출신 군사 간부들과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 장교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다. 신순호를 포함하여 오광심·김정숙·지복영·조순옥·민영주 등 6명이 광복군의 창설요원이었다.          

여성광복군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그녀는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 배속되어 방송 원고를 작성하거나 충칭의 국제방송국에서 대적 심리전인 선전 활동을 담당하였다.        

사위인 박영준은 아버지 박찬익과 함께 부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박영준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를 도왔다. 1945년에는 제3지대의 제1구대장 겸 훈련 총대장을 맡는 등 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신건식에게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오건해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당초 고향인 가덕 인차리에 마련되었으나,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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