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보기

대한의 애국부인들

3·1운동을 향해 집결하다

만나보기

글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조류를 투쟁의 물결로 바꾸는 치명타였다. 전국에서 만세의 물결을 이루었던 3·1운동은 만세 시위 과정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전국의 교사와 여학생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지역 여성과 기생, 부인들도 독립운동에 당당히 뛰어들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독립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외 애국부인들은 부인회 단체를 조직하여 결사 활동을 했는데, 이를 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라고 불렀다.  


 
alt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애국부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하다

일본 경찰은 한인 여성의 애국활동에 일찍이 주목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전국에서 의연금 모금 활동을 펼치기 위해 여성 단체 46개가 조직되었다. 양반가 여성부터 유지 부인·부실·기생·개화 여성·기독교 여성·일반 부인·여승·여학생 등 끝이 없는 여성 구국 행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19년이 되어 3·1운동 과정에서 애국부인들은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 참여를 공식화했다.        

순 한글로 작성된 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시국을 걱정한 미국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애국부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작성한 8명의 선언서로, 제작 시기는 1919년 2월로 추정된다. 김인종·김숙경·김옥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의 서명과 함께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불합리성, 국가 위기에서 여성의 역할, 동포의 분발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반인이 쉽게 공감하도록 순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주 배포 대상은 여성이었다.         

일본 외무성 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上海地方 1」에는 ‘4월 8일 러시아로부터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송부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000매를 국자가에서 간도에 배포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과 같이, 일본은 한인 여성의 애국활동을 주시하였다.   


애국부인 단체, 3·1운동에서 모이고 분투하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한인 여성들은 애국단체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3·1만세운동 이후 형무소에 투옥되는 애국지사의 행렬에 망연자실하기도 잠시였다. 형무소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잔악한 고문과 형벌을 버텨내고 있는 수감자와 재감자를 바라보며, 구국 의지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는 3·1운동 직후, 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수감자 및 재감자를 지원하고 그들 가족의 생활을 구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수감된 이들의 사식 및 필수품을 차입하고 그 가족들의 생활을 구제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펼쳤다.       

같은 시기에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는 부인 단체 결집의 필요성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여고보 출신 김원경의 주도로 최숙자·임득산·임창준·김원경·백성현·김희옥·김희열·경하순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자수품을 만들어 판매 대금으로 헌납하는 등 모금 활동에 나섰다. 


대한애국부인, 전국 13도에 지부를 설치하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앞두고 부인 대표를 파견해달라는 연락을 받은 애국부인단체는 혈성단부인회와 대조선독립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명칭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 13도 도청에 도지부를 설치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총재 오현관·부총재 김희열·회장 오현주·부회장 최숙자·평의원 이정숙·서기 김희옥·고문 이병철·지방통신원 장선희·해외통신원 경하순 등이 임원이다. 지방의 도·부·군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을 선임했다.     

이들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의 연락을 도모하고, 해외 망명지사와 그 가족들 간의 연락을 취하는 연락책 역할, 회원의 의무금과 독립자금 모금 활동, 해외 독립운동가 가족의 구제 활동, 비상시 전위부대로 활약하고 국내외 밀사 및 독립운동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초기 회장이었던 오현주의 밀고로 조직원들이 체포되어 끔찍한 수난을 당했다.


alt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동아일보』(1921. 2. 27.)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100여 명, 비밀결사를 조직하다

1920년 11월 『대련신문』에 실린 「대한부인결사체포(大韓婦人結社逮捕)」 기사에는, ‘평양에서 100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비밀 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 2,000여 원을 모집해서 보냈는데, 대부분의 여성들을 일망타진하여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 일대에서 장로파 애국부인회와 감리파 애국부인회가 통합된 조직이다. 장로파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한영신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회비 및 군자금을 모집하고 모집된 금액을 임시정부로 보내거나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는 활동을 했다. 감리파의 애국부인회는 박승일·이성실·손진실·최순덕 등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선언서를 배포하다

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 대표 41명은 호놀룰루 국민회 총회관에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손마리아를 비롯하여 김마주리·김보배·김유실·김복순·송마다·백인숙·정혜린·안득은·정마터 등으로, 같은 해 11월 ‘대한부인구제회 장정’을 만들었다. 이들은 61×79cm 크기의 대한독립선언서 포스터 3,000장을 컬러로 제작·판매하였다. 이후 그 수익금은 3·1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애국지사 가족들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쓰였다. 


alt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증서(좌) / 대한독립선언서 포스터(우)

미국 대한여자애국단, 독립의연금을 모금하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에 미국 본토에서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가 연합하여 북미지역 부인회 통합운동이 촉발되었다. 동년 8월 5일에는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윌로우스 지방부인회 등 네 곳의 단체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합동을 결의하고 결성된 조직이 ‘대한여자애국단’이다. 한인 여성들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중앙총회로 50~400달러를 보냈고 ‘부인애국단’으로 기부 행렬은 줄을 이었다. 1919년 3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약 150명의 여성들이 독립운동자금을 기부했고, 이후 모금된 독립의연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로 보내졌다. 


alt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17주년 기념(1936)(좌) / 대한여자애국단 쿠바 마탄사스 지부(1938)(우)

멕시코·쿠바로 이어진 대한여자애국단

1919년 6월 23일 한인 여성 34명이 모여 대한여자애국단 지부 성격의 멕시코 대한부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1938년 쿠바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지부가 만들어졌다. 마탄사스, 하바나, 메리다, 까르데나스에 각 지부가 조직되면서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쿠바에서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 가운데 마탄사스 지부는 ‘묵규 여자애국단 마탄사스(맛단시스)’ 강연회를 열어 회원 간의 정보 교류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애국부인의 독립정신이 국내외를 넘나들다

1919년 국내외 조직된 애국부인 단체는 13개에 이른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결사 활동, 사상 활동, 보호 활동 등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순행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조직된 애국부인 단체는 국내를 넘어 하와이, 미주 본토, 중국, 만주, 멕시코 등으로 국경을 넘어섰고, 애국 실천은 끝이 없었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