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저평가된 역사 기록은 잠들어 있다

INPUT SUBJECT

글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억겁의 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 역사학은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하나는 사상사학(思想史學)이고 또 하나는 현상사학(現象史學)이다. 이 두 시각이 혼재하지 않고서는 역사 흐름과 그 궤를 파악하기 힘든 분야가 있다. 자료의 부족, 후손의 부재, 지역 연구의 한계 등 제한된 연구 환경을 뚫고 뿜어 나오는 역사의 줄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 어머니의 역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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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총회 기념사진(1940. 6. 17. 중국 충칭)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쪽진 머리의 여성들이 밥 짓는 부뚜막을 벗어나 붓을 들고 전쟁터로 함께 나섰다. 여성들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자발적으로 나섰다. 임진왜란의 행주산성에서 부녀자와 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을 물리친 사례나,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친일 내각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운동에서 격분의 힘을 보태었던 여성의병운동에서도 알 수 있다. 


(중략)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중략)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안사람 의병단체’를 이끌었던 윤희순과 춘천 지역 부녀자 30여 명은 군자금 모금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전개되자 부녀자들은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공급했고, 정보 수집 활동, 병기 제작, 군사 훈련, 부상자 치료, 군자금 모금 등에 나섰다. 저마다 국민개병이라는 구국의식은 의병 가사와 국경을 넘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만주와 연해주 및 간도 지역에서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을 함께 견디며 3대에 걸쳐 독립정신을 이어온 힘, 그 가운데 여성의 희생과 치열함이 있다.       

같은 해 국채 1,300만 원으로 국가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경고아 부인동포라’는 격문을 공고하고 국가 위기를 알렸다.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알림은 전국 여성의 의연활동에 불을 지폈다. 양반가 부인부터 기독교 여성·부실·교사·여학생·기생·상인·기녀·여승·농민 부인·상인 부인 등이 참여했다. 전국에서 조직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는 공식 단체 29개, 비공식 단체 17개로 여성 구국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 통로가 열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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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박에스더, 차미리사, 김란사


1세대 여성 지식인,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해외 외교관은 부인과 가족을 동반하고 입국했다. 1885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아펜젤러·톰슨·마틴 등 선교사 가족의 입국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남대문 근처 상동교회에 쓰개치마를 쓴 여성들이 교회 야학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양 여선교사와 한국 여성들은 함께 사회 장벽을 무너뜨렸다. 종교 앞에 남녀 구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인간 존중의 시각이 스며들었다. 또 교육의 기회 앞에서 신분과 나이, 혼인의 경계를 초월한 행렬이 이어졌다.        

문명 진보와 개화, 사회 변화를 꿈꾸던 여성들은 남녀동권의 물음을 제기하는 1세대 여성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선교사의 지원으로 초기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신여성은 사회 각 분야에 길을 열었다. 박에스더·차미리사·김란사를 비롯하여 세계 일주에 나섰던 나혜석 등은 1세대 신여성이었고 부인들이었다.       ‘섭섭이’에서 ‘미리사(Millisa)’로 불린 차미리사도 중국에 이어 미국 유학에 나섰다. 1908년 5월 27일 상항 즉,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된 최초 재미한인 여성단체 ‘한국부인회’는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 조직의 초석이 되었다. 김란사는 1900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하고, 이화학당 총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의 불을 지폈다. 그렇게 1세대 여성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교육을 통해 독립의 꽃이 되다

대한제국기 학부차관은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대학교 1교, 신학교 각 2교, 남녀 중학교 19교, 남녀 소학교 783교, 소학생 110,040명으로 증가하는 한국 교육의 현상에 주목했다.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평양·서울·인천·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여학교 설립이다. 1920년 이전에 사립 여학교는 90여 개교에 달했고, 공립여학교는 10개교가 설립되었다. 교육을 받는 여학생들의 등장은 사회에 진출하는 신여성과 의식 있는 여성 지식인의 증가를 의미했다.        

1919년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 수는 확연히 증가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여성 유학생의 귀국과 함께 급물살을 탄 만세운동 준비는 교사와 학생들의 결사 의지 실천으로 이어졌다. 3월 1일 거사를 앞두고 종로 청년회관에는 시국강연회가 이어졌고, 비밀 연락을 받은 남녀 중학생들이 발길을 옮겼다.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남학생들이 크게 운동하고 있는데 우리 여자들이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여학생들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녀 구별이나 노소 구분 없이 혼연일체가 된 만세운동에서 여학생들은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개성 호수돈여학교 호수돈비밀결사대·이화학당 이문회·공주회 등 비밀결사대 조직으로 응답했다. 여성 해방을 주장한 여학교·여학당·여자야학회·부인야학·부인강습회 등의 일원들은 만세 현장에 몸을 실었고, 그 행렬은 국내에서 해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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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독립운동가 김배세, 신마리아, 박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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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마리아의 학생 지도용 원고 및 기록물(좌) / 3. 신의경의 서대문형무소 옥중 편지(우)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유물을 통해 기억하다

일제강점기는 국권 및 인권 침탈의 역사였다. 침탈 역사의 무게에 저항 대열에 섰던 여성들 그리고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이 남아있다.      

먼저 1909년 신마리아·김배세·박에스더 세 자매의 사진이다.(사진 1) 1세대 신여성이었던 세 자매가 평양 기홀병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 김흥택이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자녀들도 기독교의 길에 들어섰다.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에 진학하여 교사로 애국계몽의 불씨를 일구었고,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 근대여성병원 보구여관의 여의사로 부임했다. 그녀 곁에서 꿈을 키웠던 김배세는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학교의 최초 학생, 한국 최초의 간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이들의 도전은 독립을 향한 불씨가 되었다.      

이어 1916년 여성독립운동가 신의경의 모친 신마리아의 학생 지도용 원고와 여성 교육에 힘썼던 기록물, 함께 남겨진 그녀의 사진은 독립정신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사진 2)     

더불어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였던 신의경은 여성 단체 검거 과정에서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조모와 모친에게 쓴 편지가 100년이 지나도록 당시 상황을 선명히 전해주고 있다.(사진 3)     

이들 외에도 국내 여성 독립운동 관련 유물과 자료들은 기념관과 종교 시설을 중심으로 잘 보존되고 있지만 그 면면의 가치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여성의 몸짓이 기록, 서신, 문서, 선언서로 남겨져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 저평가된 그들의 기록물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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