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시간의 흔적을 따라
서울의 가을

시간의 흔적을 따라<BR />서울의 가을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시간의 흔적을 따라

서울의 가을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관조하는 것이다. 특히 일상과 여행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서울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울은 백제와 조선의 도읍지였으며 대한민국의 수도다. 한 공간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숱한 시간이 켜켜이 쌓였다. 그중에서 북촌과 서촌은 고전을 모던하게 해석한 곳이며 덕수궁과 정동길은 근대화의 토대가 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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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푸른 대나무와 어우러진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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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명물이 된 대오서점



도심형 한옥 북촌과 도심형 골목 서촌

서울은 팔색조 같은 도시다. 잿빛 콘크리트를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자연이 오롯이 드러난다. 어디 자연뿐일까. 익숙한 듯 스쳐 지나간 역사의 조각들은 길바닥에 나뒹구는 은행잎보다 더 많다. 색이 더 바래기 전에 서울의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북촌은 조선시대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살았던 고급 주택단지였다. 고관대작이 살았던 고래등 같은 저택이 지금처럼 소규모 한옥으로 변신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다. 토지가 분할된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에는 여덟 개의 특별한 풍경, 즉 북촌 팔경이 있다. 제1경은 계동 현대사옥 옆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구중궁궐을 에워싼 돌담이 보인다. 바로 창덕궁이다. 고층 빌딩 숲에 포위된 모습이지만 그 위엄만큼은 여전하다.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면 제2경인 원서동 공방길에 닿는다. 조선시대 왕실을 돌보던 나인들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그 맥을 이어 공방이 많다. 제3경은 가회동 11번지 일대로 일명 ‘박물관 길’이라 부른다. 제4경은 가회로를 건너 돈미약국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회동 31번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내친김에 가회동 골목을 올려다보면 제4경이고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제5경이다. 비탈진 골목에 작은 한옥들이 물결처럼 흐른다. 그 끝 지점에 서울N타워가 아득하다. 이곳이 팔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포토 스폿이다. 제7경과 제8경은 카페거리로 유명한 삼청동길과 이어진다. 

서촌은 카페거리로 유명하지만 도심형 골목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기준으로 통인동, 통의동 등 13개 동이 서촌에 속한다. 경복궁 영추문 맞은편에 ‘보안여관’은 시인 서정주와 김동리 선생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다. 화가 이중섭도 자주 드나들었다. 왼쪽 이면도로로 발길을 들이면 서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서촌 골목은 미로와 같아서 좁은 골목에 다세대주택과 빌라가 촘촘하게 자리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이런 이유로 서촌을 ‘시간이 멈춘 동네’라 부른다. 그 틈에 ‘대오서점’이라는 낡은 간판을 단 중고 책을 파는 서점이 있다. 6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오다가 몇 해 전부터 카페를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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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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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내려앉은 덕수궁



전통과 모던이 공존하는 곳

서울의 가을에는 덕수궁 돌담길이 있는 정동길을 빼놓을 수 없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걸어봤을 그 길. 그다지 볼 것이나 즐길 것이 많지 않던 시절엔 보물 같은 장소였다. 가을만 되면 흥얼거리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도 이 길을 배경으로 지어졌다. 뭇사람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였을 것 같은 그곳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덕수궁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궁이 되었다. 당시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그게 덕수궁이라 불린 건 1907년 순종(1874~1926)이 고종(1852~1919)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후다. 순종은 ‘덕을 누리며 장수하라’는 뜻을 담은 궁호 ‘덕수궁(德壽宮)’을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재위 기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빠른 행보를 보였다. 이런 움직임을 대변하는 것이 전통은 유지하고 서양문물은 받아들이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었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 중명전, 정관헌이 들어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화전은 1902년 고종이 처음 지을 때에는 중층의 웅장한 건물이었는데, 화재로 인해 1906년에 재건하면서 단층으로 지었다. 축소된 건물만큼이나 국력도 쇠해 보인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인 석조전은 1910년에 고종이 머물 황궁으로 영국인이 설계를 맡았다. 1층은 공적인 공간으로 거실과 접견실 등이 있으며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이 있으며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고종은 말년까지 함녕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사용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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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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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 뒤 중화전



모던 스트리트의 명맥을 잇는 정동길

근대화의 시작이었던 정동길에는 유난히 ‘최초’가 많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문과 교리문답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 것도 우리나라 최초다. 이 학교의 교육 목적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자유·진리·평등이란 기독교적 가치를 심어줬다. 이것은 학당훈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성경 구절(마 20:28)에서 뜻을 따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도 정동길에 있다.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이 1886년에 설립하였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도 1887년 왕실에서 하사하였다. 이화는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게 교육하라’는 뜻을 담았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연가’엔 ‘눈 내린 조그만 교회당’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 교회당은 정동제일교회를 가리킨다. 1885년 한옥으로 시작하였다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97년이다. 당시는 벧엘예배당으로 불렸다. 예배당은 건축 당시 큰 규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국적인 건축양식도 한몫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곳도 이 교회 지하실이다. 

이화여고 앞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중명전에 닿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다. 2년 후 전 세계에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장소도 여기다. 캐나다대사관 옆 오르막길 끄트머리에는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1851~1895)가 일본 낭인에게 죽임을 당하자 고종이 세자와 더불어 1년간 피신하였던 곳이다. 고층 빌딩 사이로 고색창연한 한옥이 얼굴을 내미는 서울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좀 더 여유롭게 즐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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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