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붓으로 독립을 외친
의로운 기자

붓으로 독립을 외친<BR />의로운 기자
글 은예린 역사작가


붓으로 독립을 외친 

의로운 기자


장덕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된 이후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는 모두 한마음과 한뜻으로 뭉쳐 강력한 독립 의지를 나타냈다. 


간도대학살 취재 중 행방불명되다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은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여기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임을 선포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끔찍한 간도대학살(일명 경신참변)을 저지른다. 이를 취재하던 언론인 장덕준(張德俊)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장덕준은 간도에서 일제의 한국인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중 갑자기 일제에 의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순직한 기자이다. 장덕준은 미국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알리면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사 기자인 그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장덕준은 1892년 6월 25일에 황해도 재령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호는 추송(秋松)으로 부친은 장붕도(張鵬道)이다. 동생 장덕수(張德秀)는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었고, 막냇동생 장덕진(張德震)은 독립운동 중 상하이에서 순국하였다. 장덕준은 1920년 4월 김성수·이상협 등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발기위원이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사실상 장덕준이 기자로서 활동한 기간은 8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언론계에 종사한 많은 기자 중에서 지금까지도 귀감이 되는 의로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늘 “기자는 붓으로 항일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며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더욱이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을 지닌 애국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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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대학살로 희생된 동포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



『동아일보』를 통해 식민정책을 비판하다

장덕준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김성수 등과 ‘육영회(育英會)’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인재 양성을 통한 조선 문화 발전이었다. 이는 1920년 3월 8일자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 학생 중 품행이 단정하고 학력이 우수한 인물을 선발하여 외국으로 유학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불행하게도 육영회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이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장덕준은 김성수 등과 뜻을 모아 『동아일보』 창간에 적극적이었다.창간 다음 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10회 발표하였다. 논설에서 일본인 교수 등이 제기한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 그리고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 언론과 여론 등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5일자부터 6월 16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 황해도 재령·해주, 평안도 평양·진남포·강서·선천·의주·신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삼민생(三民生)’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발표하였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우리 민족의 처참함과 가난한 삶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학대·멸시, 모든 식민정책이 일본인 위주의 행정으로 개편된 현장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국가보훈처는 “조사부장 장덕준이 1920년 6월 4일부터 5일간 해주에 머문다는 기사로 짐작해보아 ‘삼민생’이 장덕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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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한국인 참수 장면



미국의원단에게 일제의 불법 행위를 고발하다

동아일보사는 외신으로 들어온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을 주시하였다. 이때 장덕준을 중국으로 보냈다. 1920년 여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가 목적이었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 일행 100명(하원 44명, 상원 6명 및 그 가족들)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은 7월 초 미국을 떠나 홍콩을 거쳐 8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려 하였다. 상하이에 위치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일행을 통해 독립에 유리한 국제 여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장덕준은 7월 말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의 정세를 취재하였다. 

장덕준은 베이징에서 미국의원단을 취재할 때 상하이에서 온 안창호의 도움을 받았다. 안창호는 8월 16일 여운형·황진남·장덕준과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러 갔다. 포터는 한국 상황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당시 국내 실정과 상하이를 연락하던 장덕준은 베이징에서 시찰단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임시헌법, 불평등한 한·일 관계, 일본인의 각종 불법 행위 등을 영문으로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렸다.

그는 8월 18일 미국인 스몰을 만나 인터뷰한 후 『동아일보』는 1면에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 기사를 발표하였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표하였다. 8월 24일 밤 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의원단의 숙소로 정한 조선호텔 근처에서 군중들은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권총을 발사하며 약 100명을 곧바로 체포하는 민첩성을 보였다. 이를 목격한 의원단은 미국으로 돌아가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대영(大英)과 인도(印度)’ 논설을 문제 삼아 신문 간행을 무기한 중지시켰다. 논설 내용은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악행을 조선과 일제에 빗대어 작성한 글이었기에 식민당국자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동아일보』 정간은 1921년 1월 10일에 해제되어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을 시작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동시에 발행이 중단되고 있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만주의 훈춘(琿瑃)에서는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들에게 대패하여 분개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일제는 보복으로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하였다.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약 5,000명에 가까운 한국인들이 끔찍하게 학살되었다. 

잔인한 소식을 들은 장덕준은 건강 상태가 악화된 상태에서도 현지로 달려갔다. 외국에서 무참히 살육당한 한국인들을 애도하고 일제 만행에 분개하여 취재를 시작하였다. 암흑한 죽음의 땅에서 취재를 시작하였으나 일본인과 만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즉 일본인에 의해 피살되었을 가능성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후 소식은 물론 행적조차 추적할 수 없는 장덕준은 당시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우리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가 되었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취재를 나선 장덕준의 ‘기자정신’이 만든 참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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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장덕준



장덕준을 추모하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일본군이 장덕준을 암살한 기사를 이렇게 보도하였다.


“장덕준이 이에 대해 차마 견디지 못하고 적의 군대에 들어가 적의 상관을 보고 그러한 불인도(不人道)한 행위를 힐책하자 적측(일본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께 가서 보자고 약속하기에 무심히 여관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는데, 밤중이 되어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해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장덕준의 추도식을 진행하였다. 또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세월이 흘러 1971년 기자협회 기자장을 제정하여 기자로서 용기와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여 메달을 만들었으며, 그 메달 뒷면에 장덕준의 얼굴을 새겼다. 추도식에 참여한 김동진은 장덕준을 애도하며 “의에 대한 용기, 봉공의 정신, 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 데 대해서 나는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그를 사모한다”고 말하였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립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이었고, 미국의원단 중국방문 때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일제의 부당함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취재하며 불굴의 열정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간도참변 당시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한국인 대학살 실태를 취재하였던 의로운 기자 장덕준. 결국 일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학살 진상을 추궁한 후 피살되어 29살의 짧지만 의로운 삶을 살았던 장덕준. 그의 삶은 나라를 잊은 우리 민족의 불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여 일제로부터 가난과 부당함에 숨도 못 쉬는 우리 민중을 구제하려 뛰어든 불꽃같은 삶이었다. 

1964년 4월 30일 한국신문편집협회는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5명을 선정하였다. 그렇게 선정된 5명을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하여 모든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한 장지연,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 대만 해협 취재도중 순직한 최병우 그리고 한 명이 독립군을 취재하다 일본인에 피살된 장덕준이었다. 김인승 화백이 그린 신문회관 강단에 봉단된 장덕준의 초상화는 여전히 젊고 패기에 찬 총명하고 강인한 모습이 살아서 숨 쉬는 듯하다. 그들 못지않게 목숨을 던져 붓으로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단행한 장덕준을 대중들이 친숙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 아쉬운 마음이다. 

올해는 독립전쟁사에서 금자탑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00주년이다.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암울한 기억 속에 불행한 역사를 다시 반성하고 특히 생소한 독립운동가를 다시 조명해 그 활약상을 살펴보는 것도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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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 기자 실종 보도기사(『독립신문』 1921.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