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순국선열의 날’
역사적 의미와 제언

‘순국선열의 날’<BR />역사적 의미와 제언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순국선열의 날’

역사적 의미와 제언



매년 11월에는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치러지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 3.)과 ‘순국선열의 날’(11. 17.) 등의 법정기념일이 있다. 이 중 순국선열의 날의 경우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적잖아, 이를 되새기고 몇 가지 개선할 점을 제언하고자 한다. 


1939년, 순국선열의 날 제정

순국선열의 날은 국어사전에 ‘국권 회복을 위하여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 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라 정의되어 있다. 이날이 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이다. 1939년 11월 제31회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지청천·차리석 등이 전국 동포가 공동으로 기념할 ‘순국선열 공동 기념일’을 정하자고 제안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치일, 3·1절, 건국절(개천절), 6·10만세일 등을 기념일로 정하여 순국선열을 별도로 추모하였다. 그런데 순국한 이들을 각기 기념하는 것은 번거롭고 무명 선열을 빠짐없이 알 수도 없기에 1년 중에 하루를 정하여 공동으로 기념하자는 취지였다.

이에 다들 공감을 표하여 기념 일자를 정하였다. 순국한 이들은 국망을 전후로 그 수가 많고 망하게 된 국가를 구하거나 회복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한 것이므로, 국망 시기가 적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만 국가가 병탄된 1910년 8월 29일보다는 실질적으로 망국에 이른 ‘을사늑약’ 체결일인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 뒤 1939년 12월 순국선열기념일이 공포되었다. 기념식은 개식→창가 애국가→국기에 향하여 최경례→식사→선열들의 사적 보고→창가 추도가→헌화→묵상→기념사→구호와 만세→폐식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주목되는 바는 선열들의 사적 보고와 관련된 순국선열의 범위이다. 이에 임시정부는 순국선열의 범위를 13개 항으로 분류하면서 1895년 을미의병을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보았고, 국내를 비롯하여 인접한 중국·러시아·일본부터 미국·유럽까지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한 의병, 3·1운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등을 아울러 이념과 노선을 폭넓게 반영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을미년(1895)에 민비가 왜적의 손에 돌아간 후 나라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②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던 때를 전후하여 분하게 여겨 자결하여 돌아간 이들③ 정미년(1907)에 군대가 해산된 데 대하여 분하여 자살하며 또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맹렬히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④ 경술년(1910)을 전후하여 최근까지 직접행동으로써 국적과 왜적을 암살하며 적의 시설을 파괴하다가 돌아간 이들⑤ 국제무대에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만회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못한 것을 보고 자결하여 돌아간 이들⑥ 기미운동(3·1운동) 당시에 열렬히 시위운동을 하다가 돌아간 이들⑦ 무장하고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돌아간 이들⑧ 국외에서 왜병과 맹렬히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⑨ 적에게 사로잡혀 사형을 받으며 또는 옥중 고초를 못 이겨 돌아간 이들⑩ 러시아령과 중국령이 있는 군대로 그곳 군대의 박해를 입어 돌아간 이들⑪ 국내와 만주와 러시아령과 동경에서 적의 학살을 당하여 돌아간 이들⑫ 주의 주장을 위하여 반대당에게 애매하게 돌아간 이들⑬ 일생에 국사를 위하여 고생을 한 결과 병들어 돌아간 이들


1950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중단

광복 후에도 순국선열의 날에 대한 기념식은 이어졌다. 다만 첫 기념식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귀국한 1945년 12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 추념대회 형태로 진행되었다. 대회 총재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 위원장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였다. 국기 게양, 애국가 제창, 묵상에 뒤이어 김구 총재의 추념문을 정인보가 대독하였다. 1946년 이후에는 순국선열기념절준비위원회가 이를 주최하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주최가 서울시로 바뀌면서 새롭게 제1회 기념식으로 치러졌다. 그 뒤 1950년 6·25전쟁 이후 중단되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독립유공자 포상도 이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잇는 순국선열의 날 행사조차도 거부당한 것을 보면 당시 얼마큼 독립운동의 가치가 훼손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1957년부터 정부가 1894년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전사, 사형, 옥사한 순국선열 유가족에게 생계보조비를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그해 8월 29일 국치일에 애국동지원호회(현 한국독립동지회) 주최로 제1회 광복선열합동추도회를 개최한 이후 1964년까지 이어졌지만 날짜는 일정하지 않았다. 1958년에는 어느 국회의원이 ‘4월 17일’을 광복선열의 날로 제정하자는 건의안을 제출하였지만 “공휴일이 또 하나 는다는 생각이니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정부 차원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1965년에 11월 17일에 맞춰 광복회 주최로 행사가 열렸지만,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면서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추모행사는 현충일 행사에 포함되었다. 이때부터 현충일 행사에 ‘호국영령’, ‘전몰장병’에 ‘순국선열’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순국선열의 날 행사가 거부되자, 광복회 주최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성북구 정릉동의 여래사 순국선열 사당에서 조촐한 순국선열 합동추모식이 개최되었다. 박정희 정권 말인 1978~1979년에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추모식이 열렸지만, 시작을 임시정부가 수립한 이후부터 산정하여 혼란을 야기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에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1983년에는 행사가 ‘순국선열 합동추모제전’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97년, 국가기념일로 재탄생

한편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복원·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부되었다. 정부 측은 현충일과 중복되어 의의를 퇴색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기나긴 싸움 끝에 1997년 5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 10년 만에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되었다. 이에 1997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가 복원되었고 그 시점도 1939년 임정 의사록에 근거하여 제58회 기념식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포상 기회가 3·1절과 8·15 광복절에 이어 11·17 순국선열의 날도 추가되었다.

독립정신이 깃든 순국선열의 날 행사를 50여 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재개하였다는 점은 퍽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를 더욱 뜻깊은 행사로 발전시켜야 하는 책무 또한 막중하다. 이에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독립운동 관련 국경일이나 순국선열의 날 등의 국가기념일은 행사 자체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는 순국선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자 300만 명 중 15만 명을 순국선열로 추산하고 있지만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광복 이전 감옥에서 출소한 뒤 6개월 이내에 숨진 애국지사만을 순국선열로 인정하고 있다. 그 기간을 넘겨 후유증으로 혹은 전투 중 입은 상처로 숨졌지만 직접적인 사인을 밝힐 수 없는 경우에는 제외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을까 한다. 순국선열의 날이 진정으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기념일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