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적장을 무너뜨린
두 기생

적장을 무너뜨린<BR />두 기생

글 김종성 역사작가


적장을 무너뜨린

두 기생



임진왜란은 1231년에 1차 몽골 침략으로부터 361년 만에 발생한 초대형 국난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두만강변까지 진군하고 조정이 압록강변 의주까지 북상할 정도로 전국적 범위에서 일대 위기가 조성되었다. 풍전등화 같은 이 상황에서 관군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의병 투쟁에 나섰다. 이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왜군에 뛰어든 두 사람이 있다. 평양 기생 계월향, 진주 기생 논개다. 


평양의 계월향

왜군은 16만 대군을 동원해 침공을 감행하였고, 당황한 조선군은 북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선조 임금이 원성을 무릅쓰면서까지 한양을 떠나 북상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의병들이 등장하여 상황을 바꿔놓았다. 조선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왜군과 싸웠고, 이로 인해 왜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왔다. 평양성을 점령한 왜군이 우세를 점한 상황에서 조·명 연합군이 대치하게 된 이때 계월향이 등장한다.

임진왜란은 양력으로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발발하였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은 양력 7월이고, 되찾은 것은 이듬해 2월이다. 계월향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기간이다. 평양 역사를 기록한 『평양지』에 따르면, 이 성을 빼앗길 당시 계월향은 성내에 있다가 왜군에 붙들렸다. 그 뒤 왜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총애를 받는 일본 장수에게 넘겨졌다. 평양성 왜군의 중추 역할을 하였던 이 장군이 나이토 조안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이토 조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30년 뒤에 죽었다. 계월향을 붙들어둔 장수는 계월향과 같은 날에 죽었으므로 나이토 조안이 아닌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그 장수의 신상은 알 수 없다.


계월향 오빠의 평양 잠입

계월향은 억류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일본 장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1592년 연말로 추정되는 시점에 이르러 그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평양지』에 따르면, 그는 “친척이 보고 싶어요. 서문 쪽에 갔다 올게요”라고 말하고 외출을 하였다. 

서문 성벽에 올라보니 성문 밖에서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성내에 갇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계월향은 그들을 향해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며 외쳤다. 이는 자기를 도와줄 남자를 찾는 외침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백성들 틈에서 튀어나왔다. 일반 백성의 옷을 입은 이 남자는 계월향을 아는 척하며 성벽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평안도 용강현 출신으로 첩보 활동에 일가견이 있는 김경서 장군이었다. 김경서가 다가오자 계월향은 낮은 소리로 “저 좀 빼내주세요. 목숨을 다해 은혜를 갚을게요”라고 간청하였다. 

김경서는 “나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계월향은 일본 군인들에게 “제 오빠이니 성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요청하였다. 조선군 장수가 평양성에 잠입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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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의병부대의 정암진 전투를 묘사한 상상화(전쟁기념관 전시)



적장을 쓰러뜨리다

두 사람은 성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일본 장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한밤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홀로 숙소로 돌아간 계월향은 일본 장수와 대화를 나누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장수는 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고, 계월향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뒤 약속 장소로 나가 김경서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일본 장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계월향은 “저놈이에요”라고 소리쳤고, 김경서는 칼을 뽑아들었다. 평양성 왜군의 핵심 장수가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숙소를 빠져나왔다. 김경서는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적장의 목을 들고 나왔다. 계월향과 함께 성벽을 향해 달리던 김경서는 성벽이 임박한 지점에서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였다. 몸을 돌려 계월향을 찌른 것이다. 나중에 그는 “두 사람 다 성벽을 넘기 힘들어서 계월향을 죽였다”고 말하였다. 

조선 장군을 적장 앞에까지 안내하는 위험을 무릅쓴 계월향은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며 세상을 떠났다. 시인 한용운은 〈계월향에게〉에서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라며 계월향을 위로하였다. 

『평양지』에 따르면, 그날 밤의 사건을 계기로 왜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상태에서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왜군은 성을 잃고 남하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때부터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전세의 변화가 계월향의 용기 있는 행동에서 비롯되었으니, 평양성 수복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진주의 논개
1593년 2월 초에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로 명나라 군대는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1개월도 안 되어 벌어진 경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끝내는 데만 급급하였다. 전세가 조선에 유리한데도 명나라군은 왜군의 휴전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전황이 소강 국면에 접어든 상태에서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면서 논개가 순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상도 동남부로 밀려나 있었던 왜군이 휴전회담이 시작된 마당에 진주성 점령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함과 동시에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차지해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진주성 함락으로 인한 조선 측의 인명 피해는 6만 명을 넘었다. 전쟁 중에 광해군을 보좌하였던 어우당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거의 다 죽었다”고 말하였다. 진주성은 참혹하게 파괴되었고 왜군은 백성들을 겁탈하였다. 이 와중에도 논개는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몄다”고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다. 
진주성이 함락된 그날 논개는 진주시를 관통하는 남강으로 걸어갔다. 남강변에 촉석루가 있었고 그 누각 아래에 바위가 있었다. 훗날 의암으로 불리게 된 바위였다. 조선 후기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은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 바위는 강 언덕과 떨어져 있는데 위는 두 사람이 상을 놓고 둘러앉을 만하고 아래는 깊디깊은 물결 속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강 언덕에서 건너뛰어야 의암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름답게 꾸민 논개는 몸을 날려 의암으로 건너갔다. 바위 위에는 논개뿐이었다. 이를 보고 강 언덕 왜군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논개 곁으로 가려면 강물 위로 몸을 날려야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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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투쟁에 참여한 행주대첩 당시의 여성들(행주산성 벽화)


적장을 사로잡다
이때 적장 한 명이 의암으로 건너뛰었다. 이 장수가 제3군단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라는 말도 있었지만, 가토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12년 뒤에 죽었다. 이때 전쟁 도중에 죽은 사람은 가토의 부하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여러 왜병들이 논개를 바라보고 좋아하였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는데, 한 장군이 홀로 나서서 다가왔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게야무라가 건너오자 논개는 미소를 지었고, 게야무라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우야담』은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고 묘사한다. 게야무라가 끌어당기자 논개도 그를 끌어안았다. 그런 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논개는 물속에도 상대를 꽉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병사들이 게야무라를 건지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까닭은 논개가 단단히 끌어안고 가라앉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순국은 전세에 영향을 미쳤다. 진주 출신 학자인 박태무(1677∼1756)는 『의기전』에서 “왜적은 장수를 잃자 흐트러지고 무너지며 달아났다. 그래서 진주성은 다시 온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왜군은 진주성을 오래 지키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주변 지역을 약탈하느라 군사력을 소모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개로 인해 장수를 잃고 당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진주를 방문한 시인 정지용은 “한 개의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한 개의 적 군단을 섬멸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은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왜적을 몰아냈다. 백성들은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달려들어 이 땅을 지켜냈다. 그런 백성들 중 두 사람이 계월향과 논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