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보는 역사 이야기

김지섭의 의열투쟁과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김지섭의 의열투쟁과<BR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김지섭의 의열투쟁과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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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호외(1924. 4. 24.)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서 김병규(金秉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8월 전주재판소 번역관보를 거친 뒤 같은 해 11월부터 금산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였다. 이즈음 일제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강탈한 기유각서(己酉覺書)로 1909년 11월 법부가 폐지되고 통감부 사법청이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김지섭은 대한제국 법부 소속이 아닌 통감부 재판소의 통역생 겸 서기가 되고 말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에 강점된 후 금산군수로 있었던 홍범식(洪範植)이 자결 순국하였는데, 이 일은 김지섭이 1913년 1월 당시 영동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 자리를 그만두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여름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지린시에서 결성되었다. 1920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한 의열투쟁 단체로 침략의 책임자와 매국노 그리고 식민통치와 수탈 기관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의열단은 본부를 상하이로 옮긴 뒤 대대적인 처단·파괴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김지섭이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김지섭은 의열단에 가입하자마자 대규모 암살 파괴 공작에 참여하였다. 당시 의열단의 암살 파괴 공작은 김한(金翰)과 김시현(金始顯)을 중심으로 하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두 계획은 모두 실패하였다. 김한은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 의거 직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고, 김시현은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유석현(劉錫鉉) 등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3년 9월에는 일본 도쿄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대지진인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당시 혼란 속에 폭동을 염려하였던 일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수많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열단은 일제를 응징하여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때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공격 목표를 일본 제국의회로 정하였다.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요인을 처단하고 조국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어 파견 인물을 정하였는데 여기에 김지섭이 자원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밤, 김지섭은 의열단 기밀부가 마련해 준 소형 폭탄 3개를 숨기고 미쓰이(三井)물산 소속의 화물선인 텐조야마마루(天城山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10일 뒤인 12월 30일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배가 야와타(八幡) 제철소에 도착하자 뭍으로 내렸다. 1월 3일 밤 도쿄로 향하였고 5일 아침 도쿄 시나가와(品川) 역에 이르렀다. 이후 제국의회가 휴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공격 대상을 일본 왕궁으로 바꾸었다. 

그는 오후 7시 20분쯤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 다다랐다. 마침 그 부근을 지키던 히비야(日比谷) 경찰서의 오카모토 시게요시(岡本繁榮) 순사가 검문하자 김지섭은 순사를 향해 폭탄 1개를 던졌다. 그리고 니주바시 쪽으로 달려가 다리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자 다리를 경계하고 있던 근위 보병 2명이 총검을 겨누며 다가왔고, 그는 이들을 향해 남아있던 폭탄 2개를 던졌다. 그가 던진 폭탄 2개는 니주바시 중앙에 떨어졌지만 모두 불발에 그쳤고 김지섭은 격투 끝에 붙잡혔다.그는 옥중에서도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언도하라”는 요구를 하며 일본 법정의 권위나 존재를 부정하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이후 더 이상의 재판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공소심 판결 직후 변호사가 의논도 없이 상고하자, 그는 8월 18일 이를 취소시켜 버렸다. 이후 일본 도쿄 시내의 이치가야 형무소로부터 도쿄 외곽의 치바(千葉) 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1928년 2월 20일 갑자기 순국하였다. 투옥된 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동생 김희섭의 부검 요청에 따라 2월 23일 촉탁의사 이즈시마(間島)의 입회하에 치바 의과대학병원에서 부검이 이루어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뇌일혈’로 판명되었으나 의사조차 “뇌일혈은 분명한데, 기관지 출혈의 장소와 그 모양이 일반 통례와는 다를 뿐 아니라 거의 보지 못한 현상”이라는 소견을 내렸다. 결국 김지섭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김지섭의 니주바시 투탄의거는 비록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8년 뒤 이봉창의거로 이어지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빛나는 의열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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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김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