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유일한 부부 의병
강무경과 양방매

유일한 부부 의병<BR />강무경과 양방매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유일한 부부 의병

강무경과 양방매



일제의 침략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을 당시 1908년, 강무경 의병장은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전투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때 영암으로 이동해 선비 양덕관 집에 머무르며 둘째 딸인 양방매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강무경의 만류에도 양방매는 그를 따라 항일전에 함께 나서며 1년여간 전투를 함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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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무주 나제통문 입구에 세워진 강무경·양방매 부부 사적비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에 나서다

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력 항쟁으로 이를 타개하고자 재야 유생과 민중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외세 침략이 빈번한 우리나라는 전통시대부터 ‘위국헌신과 향토 지킴이’로 국난극복을 위한 자기희생에 투철한 의병 활동이 이어졌다. 개항 이후 외세 침략이 강화되는 상황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민족자존과 자기 정체성’ 정립을 시대적인 소명으로 인식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승패에 전연 개의치 않은 의병정신은 1895년부터 일제강점기 50여 년에 걸친 독립전쟁의 정신적인 자양분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과 친일정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였다. 이 땅의 선각자와 민중은 현실 모순을 타개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데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최소한 ‘민족 자존심’을 일깨우고 지키려는 냉엄한 현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 

11월 17일은 이 땅 독립과 자유를 위해 민족제단에 목숨마저 초개처럼 던진 선조들을 기억해야 하는 순국기념일이다. 이들은 안락한 삶이나 명예와 너무나 거리가 먼 인생역정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조그마한 주저함이 없었다. 전통과 근대적인 가치관이 혼재한 당시 부부 의병운동가 탄생은 분명 우리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 부부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억의 망각에 갇혀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부부 의병운동가의 치열한 흔적을 찾는 일은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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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동상과 건립기문이 인생 항로를 말하다

전북 무주는 과거 심산유곡이었으나 이제 덕유산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나제통문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 관문으로서 이를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 땅이고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은 신라와 백제 양국에게 전략적 요충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행정구역상 무주군 소천리에 속하나 언어와 풍속 등이 너무나 다르다. 인근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웅장한 동상 등은 눈여겨볼만하다. 

동상의 주인공은 이곳 출신 강무경(姜武景) 의병장이다. 총을 든 의병이 턱수염을 기른 채 버티고 선 의연한 모습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동상 아래에는 ‘건립기문’과 ‘의병활동 요약’이 새겨져 있다. 동상 옆에는 동상의 주인공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의병장 강무경상  건립기문과 의병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부귀영화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목숨을 바치신 강무경 의병장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기리고 자손만대에 이어갈 민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55명의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 동상을 건립하오니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함으로써 민족 수난사의 횃불이 되어 다시는 조국강토에 이토록 슬픈 역사가 없기를 기원합니다.”


강무경 의병장께서는 1879년 음력 4월 8일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태어났다. 사숙에서 전통교육을 받은 후 필묵상(筆墨商)으로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의병장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대일항쟁을 결의하고 의형제를 맺은 다음 김율(金律) 의진에 소속, 대일항전을 벌이던 중 1907년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었다.

1908년 3월 7일부터 10월 27일까지 강진·장흥·남평·능주·영암·나주·해남 등지에서 9회에 걸쳐 전투에 참여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살해하고 많은 수량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양하였다. 그러다 신병 치료차 격전지였던 능주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1909년 8월 26일 체포되었으며, 동년 9월 2일 광주로 이송되었으나 동년 12월 15일 대구감옥소로 이감되었다. 1910년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강무경 의병장의 다른 이름은 강윤수(姜尹秀)이다. 필묵상으로 살아가던 중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심남일·김준·김율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의기투합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심남일과 11월에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이듬해 2월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하여 3월 강진군 오치동에서 적 수십 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심남일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제 군경을 물리치면서 항간에는 이를 칭송하는 동요까지 생겨났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 산 밖으로 솟아오르면 / 현수는 풍운을 조화하여 /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라는 명성이 자자하였다.이어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과 반촌 등지에서 격전을 치러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불가능하자 의병진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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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 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투옥된 호남의병장들(1909)



양방매 의병 홍일점으로 합류하다 

양방매(梁芳梅, 1890~1986)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서 선비 남원 양공 덕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8세인 1908년 9월 구국의 일념에 불탔던 강무경 의병장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내조하였다. 1909년 3월부터는 남편의 부대에 가담해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 산악전에서 홍일점 의병으로 맹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음력 8월 26일 능주 풍치(風峙)에서 심남일과 함께 은신 중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함께 있던 양방매 부인은 나이 어린 여자라고 훈방되어 친가로 돌아간 후 평생을 숨어 살았다.

그 후 강무경 의병장은 광주에서 대구감옥소로 끌려다니며 악형을 당하다가 1910년 음력 7월 32세 젊은 나이로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은 채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 친척들은 형장으로 달려가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하여 시신을 수습하고 5일간 야간을 이용해 고향땅 설천으로 운구하여 이남(伊南)마을 말굴재에 모셨다. 이후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된 뒤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24호에 안장하였다.

한편 남편과 사별한 양방매 의병은 친가에서 일생을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28일 향년 96세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1986년 전남 영암 금정면 남송리 당치(堂峙)에 묻혔다가 1995년 10월 9일 자손들의 노력으로 국립묘지 남편 묘소에 합장되었다. 이에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빛나는 공적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그 사적을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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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감옥 군산 분감



운명적인 만남으로 의병운동에 나서다

한편 영암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점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였다. 목포의 일본인 상업회의소에서 전남 의병을 조속히 진압해 줄 것을 통감부에 호소하였다. 다른 지역 의병 활동의 기세가 약해진 후에도 최후까지 활발한 전투 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함평에서 거의한 심남일 의진과 박사화 의진 등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 헌병대나 군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대부분 전투 과정에서 순국하였다. 영암 의병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양방매처럼 여성의 몸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실이다.
강무경 의병장이 심남일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할 때였다. 일본군과 교전한 강무경은 전투 후유증으로 신열에 시달렸다.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양덕관의 둘째 딸 양방매에게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두 사람이 좋은 배필이라고 생각하여 부부로서 인연을 맺어주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원기를 회복한 강무경은 채비를 차리고 다시 의병활동에 나서려 하였다. 남편은 아내에게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다”라며 집에 남아 있으리라고 간곡하게 만류하였다. 아내는 자신의 굳건한 뜻을 전혀 굽히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부부 인연이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뛰어넘어 동지로서 길을 걷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양방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위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여 동안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 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 3월 8일에는 강무경 의병부대가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제 군경을 사살한 거성동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 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하던 때인 1909년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형무소로 압송되었다. 남편은 대구감옥소로 이감되어 순국하였다. 반면 양방매는 어린 여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 
목숨을 걸고 남편을 따라간 양방매는 남편 사후 의병활동을 하다가 병사한 오빠 양성일의 딸을 기르며 오랜 세월을 숨죽이며 살았다. 1984년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는 가운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월 28일 96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2005년 양방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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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등 의병 무기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