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결성과
외교 후원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결성과 <BR />외교 후원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결성과 

외교 후원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⑥



3·1운동 발발 이후 미주 한인사회에는 뜨거운 독립운동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은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던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특별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조소앙의 유럽 외교활동

조소앙은 1917년 8월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스톡홀롬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주의자대회 참가를 위하여 조선사회당을 만들어 외교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을 도와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같은 해 5월 상하이를 떠나 6월 말경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 도착하였을 때 파리강화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언급이나 논의도 없이 종결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규식을 비롯하여 파리한국통신부에서 활동 중 이관용·황기환·김탕 등과 함께 유럽에서 선전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국제노동사회주의자대회(Lucerne International Labour and Socialist Conference: 일명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리자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께 같은 해 7월 17일자로 대회 의장에게 참가 의사를 밝히고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본 대회는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아울러 한국을 신생 국제연맹의 회원으로 가입시켜야 한다는 결의도 이끌어냈다.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한국 독립을 승인한 외교적 성과였다. 곧이어 조소앙은 같은 해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한 만국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켰다.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의 결성

미주 한인사회에 조소앙의 구미 외교활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19년 말경 조소앙이 자신의 활동 상황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이살음에게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면서다. 당시 이살음은 『신한민보』 편집인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는 임용호와 임일을 비롯해 김호·문양목·이순기·임정구·송창균·전명운·이흥민·이범녕·장기영·김진형·김탁·최응선 등과 협의하여 그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재미 한인들은 그의 후원을 계기로 노동을 통한 사회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새로운 단체를 발기하기로 하였다. 

발기자들은 1919년 12월 2일부터 3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12월 7일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Korean Labor Party: 이하 ‘노동사회개진당’)을 설립하였다. 설립 목적은 ‘일체 자결한 자주 민족의 세계적 신기운에 순응병진하여 노동·경제·정치·종교의 공동 협진’에 두었다. 즉 동포 남녀의 평등과 정의·인도로 자주 민족의 평화를 유지하고, 노동사회를 보호하되 의무와 권리를 똑같이 나누며, 농공어광(農工漁鑛)의 민중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대한국(大韓國)의 독립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대동건설에 협찬하는 것을 설립의 종지로 삼았다. 이러한 뜻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동을 근작(勤作)하고 공제(共濟)를 계도(啓導)하며 사회를 개진(改進)하는 것으로 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노동자 중심의 사회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조소앙의 표현에 의하면 해외 최초로 결성한 한인 노동 정당이었다. 운영과 당원 입당은 자체의 헌규(憲規)와 세칙을 통해 시행되었고 건국기원절(음력 10월 3일), 독립선언일(3월 1일), 독립승인일(8월 9일), 본당 설립 기념일(12월 7일)을 본당의 주요 기념일로 제정했다. 스위스 루체른 대회에서 이루어낸 1919년 8월 9일의 독립승인일을 3·1독립선언일과 동격으로 기념한 것은 본당의 설립이 조소앙의 외교활동과 그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고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와 12월 13일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제1차, 2차 선포식을 거행하며 대내외에 창립 사실을 알렸다. 임원은 수령 1인과 이사 9인으로 구성했고 초대 수령은 이살음이 맡았다. 회원은 당초 140여 명이었다가 1920년 이후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규정 보완을 위해 1920년 2월 26일 다뉴바에서 연합협의회를 개최하여 13개 조의 의안을 결정하였고, 그 해 3·1절 기념행사를 캘리포니아 남북 두 곳에서 당원 친목회를 겸해 개최하였다. 

1920년 5월 17일 기존의 헌규와 규칙 등을 개정함에 따라 노동사회개진당은 고문부·집행부·공의부의 조직으로 재구성하였다. 당무는 집행부의 계획에 대해 공의부의 검토를 거쳐 집행부가 시행하는 체제로 하였고 고문부는 두 부서 간의 자문과 협찬을 맡았다. 고문부의 인물로는 서재필과 김규식을 찬성장으로, 조소앙과 송헌주를 대표원으로 선임하였고 공의부에는 전성룡·오충국·박희성·김순권을 임명하였다. 집행부는 수령 이살음, 총무 김정진(김호), 재무 이흥만, 외무 정한경, 업무 김종림로 구성하였다. 그밖에 지방임원을 도령위라 부르고 당원 10명 이상이 모이면 1당계로, 당계 2개 이상이 모이면 대당계라 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임원은 다뉴바대당계 도령위 장기영, 윌로스대당계 도령위 전명운, 새크라멘토 도령위 김찬일으로 선임하였다.


조소앙의 외교활동 후원과 『동무』 발간

노동사회개진당은 유럽에 있는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돕는 데 역점을 두었다. 창립 직후부터 1920년 3월까지 조소앙에게 보낸 외교활동비는 2,200달러(프랑스화로 26,590프랑)였고, 그 이후의 송금까지 포함하면 총 2,500여 달러였다. 창립 초기부터 많은 금액을 송금할 수 있었던 것은 수령 이살음과 총무 김정진의 적극적인 의연금 모금활동과 여기에 적극 호응한 회원들의 열성 때문이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자체 홍보와 활동 소식 등을 알리기 위해 1920년 7월 필사체로 된 『동무』를 발간하였다. 발간 취지에 따르면 지위고하나 빈부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을 다같이 ‘동무’라 할 것이며 『동무』는 바로 이런 ‘동무’를 돕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동무』는 노동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연구, 나아가 이와 관련된 수양과 생활에 역점을 두었다. 조소앙이 유럽에서 외교를 마치고 1920년 10월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1921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가면서 노동사회개진당의 활동은 약화되었다. 1923년 2월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후 1924년 1월 1일 송구영신을 겸한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후 별다른 활동 없어 유명무실해졌다. 노동사회개진당은 3·1운동 직후 자주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목마른 재미한인들의 독립열정의 산물이자 노동을 신성시 하는 독립국가 건설을 꿈꾼 단체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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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당원증(1920.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