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배중손과
삼별초의 항쟁

배중손과 <BR />삼별초의 항쟁
글 김종성 역사작가


배중손과 삼별초의 항쟁



몽골 기마대에 유라시아대륙이 무릎을 꿇고 팍스 타타리카(Pax Tatarica)*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수립되던 서기 13세기에도 고려왕조는 끝까지 국체를 유지하였다. 40년 항쟁 도중에 강화조약을 맺고 사대관계를 체결하기는 했지만, 한민족은 몽골의 지배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한민족이 그런 기질을 발휘하는 데 기여한 인물과 집단 중 하나가 배중손과 삼별초다.


*팍스 타타리카(Pax Tatarica)

라틴어로 ‘몽골이 주도하는 평화’를 의미하는 이 말은 13~14세기에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대륙 상당 부분을 지배할 당시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치적 안정과 질서를 되찾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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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대몽항전 기록화

배중손과 삼별초의 등장 배경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기간은 항몽 전쟁 막바지인 1270~1271년,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에 그는 삼별초를 이끌며 매우 굵직한 행적을 남겼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은 “배중손은 원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에 이르렀다”는 말로 시작한다. 원종이 즉위한 연도이자 고려 왕실과 몽골이 강화조약을 체결한 1260년부터 배중손은 몇 단계 승진을 거쳐 장군 자리에 올랐다. 

무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1170년 무신정변 이후 고려에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가 공존하였다. 왕이 이끄는 조정과 무인들이 이끄는 무신정권이 그것이다. 그런데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발발한 지 27년 뒤인 1258년에 김준이 최 씨 정권을 무너트리고 무신정권의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무신정권과 조정은 타협을 모색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원종 임금이 무신정권과 함께 1260년의 강화조약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최종적 의미의 평화조약이 아니었다.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는 전쟁은 1273년에야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

몽골과 싸우던 시기에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 아닌 강화도였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궁지(高麗宮址)라는 이름의 고려 궁터가 남아 있다. 1260년 조약 후에도 고려의 수도는 여전히 강화도였다. 당시만 해도 몽골인들이 바다에 약했기 때문에 강화도를 지키는 한 무신정권은 몽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 원종은 1270년에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그는 몽골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강화도보다 개경이 더 유리하였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배중손과 삼별초의 선택

배중손 열전은 “원종 11년(1270년)에 국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길 당시 방을 붙여 일정한 기일 내에 모두 개경으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지만, 삼별초는 딴 생각을 품고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신정권 특수부대인 삼별초가 독자적 노선을 표방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삼별초 말고도 마별초·야별초·전봉별초·별초도령 등의 부대가 등장한다. 별초는 지금으로 말하면 특수부대·결사대·선봉부대와 같다. 이 중에서 삼별초는 야별초를 확대·개편한 부대였다. 군사 부문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고려사』 병지(兵志)는 이 제도가 최 씨 무신정권의 제2대 지도자인 최우(최이) 때 생겨났다고 말한다. 


“최우가 나라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순행시켜 폭행을 금지하였으니, 이것을 야별초라 불렀다. 그 후 도적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 (중략) … 나중에는 좌우 별초로 나누게 되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서 몽골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을 모아 한 개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이라 하였는데, 이것들을 통틀어 삼별초라 하였다.”


좌우 별초와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였다. 개경 환도는 항몽 전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자 무신정권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삼별초의 환도 거부에 대해, 원종은 삼별초 해산으로 응수하였다. 하지만 배중손은 이 조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삼별초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규합해 항몽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배중손 열전에 따르면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모이라”고 호소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는 1,000여 척의 배에 탑승할 만한 사람들이 삼별초에 합류하였다는 배중손 열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꿈

배중손과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항몽 전쟁을 지속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다. 그들은 왕족인 왕온을 군주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고, 강화도를 수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삼별초 외의 병력이 이미 강화도를 떠난 뒤였다. 삼별초만으로 강화도를 지키는 게 무리라고 판단한 배중손과 삼별초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았다. 바로 전라도 진도였다. 

이들은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거점을 옮겼다. 배중손 열전에서는 이들이 강화도를 떠날 때 수많은 민간인과 재물을 실은 1,000여 척의 배가 뒤따랐다고 말한다. 신라의 장보고가 완도에서 꿈을 품었다면, 배중손과 삼별초는 진도에서 꿈을 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진도 인근 지역을 영향권 하에 두고 일종의 해상왕국을 세웠다. 

배중손 열전은 “적들은 진도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였다”고 말한다. 삼별초가 ‘적’으로 표기된 것은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정부가 삼별초를 반군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들의 불편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몽골은 삼별초의 왕국을 좌시하지 않았다. 1271년, 몽골은 원종과 연합해 진압군을 진도에 파견하였다. 배중손 열전은 삼별초 주력부대가 이 전투에서 패하였다고 설명한 뒤 “적장 김통정이 패잔병을 거느리고 탐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배중손 열전에는 배중손의 최후가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다. 김통정이 새로운 지휘자로 등장하였다는 점만 알려줄 뿐이다. 이는 진도 전투에서 배중손이 전사했음을 추정케 한다. 그가 투항했을 거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런 증거는 없으므로 삼별초 주력부대의 패전과 함께 배중손도 전사하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다. 배중손을 잃은 삼별초 잔여 부대는 2년 뒤 탐라에서 최종 공격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항쟁의 역사적 의미

1273년에 배중손과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42년간에 걸친 고려인들의 항몽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의 투쟁은 결국 실패하였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면 결코 실패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격렬한 저항은 몽골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의 민족이 몽골 앞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도 배중손과 삼별초는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은 고려인들에게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몽골인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점은 이후 친몽골파에 의해 제기된 입성론(入省論)이 몽골 조정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 데서도 나타난다. 

입성론은 고려를 몽골의 1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기록된 몽골 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의 왕약 열전에 따르면, 몽골 정부는 “그렇게 해봐야 고려 백성들이 사납게 돌변하면 우리 힘만 소모하게 된다”며 입성론 논의를 중지시켰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몽골인들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주고 고려의 국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배중손과 삼별초는 그 누구에도 맞서 싸우며 자기 땅을 지켜내는 한민족의 근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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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