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영원한 독립군 김준엽과
동지 민영주

영원한 독립군 김준엽과 <BR />동지 민영주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영원한 독립군 김준엽과 

동지 민영주



스무 살 초반 학병으로 징집된 김준엽은 중국 전선으로 보내져 일본군 경비중대에 배속된다. 이후 입대 전부터 준비하였던 주도면밀한 계획을 성사시켜 탈출에 성공하고, 염원하던 김구를 만난 뒤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어 독립군 특수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장군의 비서로 일하던 민영주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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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S 대원들(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학도병에서 영원한 독립군으로 다시 태어나다 

김준엽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주위 친구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아울러 항일의식에 충만하였다. 왜곡된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격언을 가슴에 새기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에 충실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전선이 확대되자 인적·물적으로 부족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중등교육기관은 군사교육을 강화하는 등 ‘병영기지’나 다름없었다. 교련경연대회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려는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강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제 교육기관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 군수기지로 변질되었다. 학도지원병제 실시는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만약 여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본인은 물론 가족 등에게 협박을 일삼았다.

재학 중이던 1943년 한국인 학생 강제징병에 따라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학도병은 말만 자원입대일 뿐 강제징집이었다. 학병들은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김준엽은 지원할 때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학병탈출 제1호), 장준하 등과 함께 린취안(臨泉)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가는 7개월에 걸친 6,000리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일본군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중국인 농민이나 상인으로 위장한 채 밤을 이용한 고난에 찬 행진이었다. 무사히 충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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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S 특수훈련을 앞두고



국내정진군으로 항일운동 최전선에 나서다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8년간 중국 각처로 이동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를 거행하였다. 비로소 군대를 가진 정부로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총사령부는 11월에 시안으로 이전하여 4개 지대로 편성하는 등 인력 충원에 박차를 가하였다.

장준하·노능서·김유길 등과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정신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사훈련은 중국군 장교와 중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담당하였다. 정신교육은 김학규·이평산·조평산 등이 맡았다. 한국독립운동사, 임시정부의 연혁과 건국 강령, 세계혁명사 등은 항일투쟁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잡지를 간행하는 등 독립군으로서 자신감과 사명감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학병은 대부분 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하였고, 영어를 구사하는 어학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2지대 대원과 학병은 미군 첩보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굳건한 기초가 되었다.

1945년 4월 말에는 19명의 동지들과 함께 OSS 훈련을 받기 위하여 시안의 제2지대와 합류하였다. 전세도 급박하게 돌아가 5월에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연합국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 한국인은 암울한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

이에 부응하여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장래와 향후 대책을 강구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하여 한반도에 진입시키기고자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국내정진군은 OSS팀과 제2지대 대원으로 모두 94명이었다. 총지휘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이들 임무는 국내 질서유지, 일본군 무기 접수, 임시정부 귀국을 위한 기반 조성 등이었다. 한국인 파견 대원은 처음에 7명이 선발되었으나 비행기의 적재 무게 한계로 김준엽을 비롯한 이범석·장준하·노능서 등 4명과 미군 18명 등 모두 22명이었다. 

8월 16일 처음으로 시안을 출발하여 한반도로 향하였으나 ‘가미가제 특공대’가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회항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8일 시안을 출발한 비행기는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너무 벅찬 순간이었으나 희망은 좌절감으로 돌변하였다.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종전 처리 지연으로 뜻대로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들 일행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이들은 일행을 포위하고 서울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고압적인 자세였다. 이튿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중국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8월 20일 쿤밍 OSS 본부는 버드에게 즉시 서울에 다시 돌아가 설사 일본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류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에 머물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서울로 진입은 독수리작전 요원 22명 전원에 대한 ‘사형 집행’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28일 독수리팀은 시안으로 복귀하여 국내진공작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리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건국하려는 꿈도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장정』에서 학도병 탈출기를 복원하다

이 책은 해방 직후가 아닌 시절에 자신의 탈출기를 출판하였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1944∼19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지사는 당시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기 위함이 아니고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유신정권과 군부 독재 정치로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금기되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식민 지배하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분투하였듯이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매진한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후 지사는 학문 연구와 더불어 유신독재체제의 시퍼런 서슬 아래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현실을 회피하거나 힘든 인생역정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학자였다. 다음은 교육자로서 독립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갈이다. 군부독재정권의 국무총리직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는 자기 자신에 충실한 존경받는 인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민영주 지사와 인연을 맺다

민영주는 1923년 8월 5일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이며 임시정부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閔弼鎬)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규식의 비서로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보좌하고, 항일정신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국내와 만주·미주에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로 일찍부터 항일의식에 눈을 떴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자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부원으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한 심리작전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파견 근무하였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지사의 활동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1945년 4월에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복무하였다. 여성 광복군으로서 활동은 오늘날 여권신장을 이룬 조그마한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엽 독립군과 백년가약을 약속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국내정진대에 편성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험지로 김준엽 지사가 과감하게 택할 수 있었던 용기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민영주 지사는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현재 생존해 계시며 파주시 탄현면 자유로 요양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건강이 회복되어 지사님의 발자취가 새롭게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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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주 여사와 훈장


독립정신으로 후학 양성에 진력하다

해방 이후 교육에 뜻을 두어 중국에 남아 1946년 중국국립 동방어문 전문학교의 한국어 강사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발을 디뎠다. 1949년 난징(南京)의 국립중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5년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연구원을 수료하였다.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사상계』의 편집위원·주간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집필 활동을 하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과 같은 역저도 저술하였다.  

김준엽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대학교 총장 시절에 학생들 보호에 남다른 노력은 독립정신을 실현한 화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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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공동작전을 위한 OSS 양측 수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