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청년혈성단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청년혈성단과<BR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청년혈성단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③


한인 청년들의 각성과 청년혈성단 결성

3·1운동은 재미 한인 청년들의 심장에 독립운동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였다. 1919년 5월 김정진, 최능진, 이용근, 최응선, 한장호 등 청년 23명은 피 흘려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이들은 “국혼이 있는 충의용감의 열혈 남녀를 단합하여 죽고 삶에 함께 함을 맹약하고 우리 독립 대사업을 기어이 이루기로 목적을 정하였나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 온갖 적당한 사업이면 무엇이든 행하여 보자 함이외다”라는 「청년혈성단취지서」를 발표하고 청년혈성단을 설립하였다. 

청년혈성단은 4대 강령을 제정하였다. ‘새로 건설한 우리 공화정부를 위하여 혈성을 다 할 것’과 ‘대한인국민회의 주의 방침에 복종하며 특별 공헌할 것’이라 하여 3·1운동으로 새로 탄생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충성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속히 우리 독립운동에 실용할 군사상·학술상 혹은 기예를 배울 것’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의 인도를 무시하고 정신상이나 물질상으로 살도(殺道)하는 모든 해독물을 박멸할 것’이라 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학술상의 기예를 배워 정의와 인도를 해치는 모든 해독물을 박멸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청년혈성단은 1919년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에서 발기인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대표회에서 이살음이 특별 연설을 했고 규칙을 제정하였으며 단장 황사선, 서기 신윤국으로 하는 내부 조직을 만들었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학술상의 기예를 배우겠다는 강령의 취지에 따라 단원들은 미국 내 비행학교와 미군 육군 항공대에 들어갔다. 먼저 이초, 이용근, 장병훈, 이용선, 한장호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하였고, 최자남은 미국 육군항공대에 들어가기 위해 샌디에이고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하였다. 

군사상의 기예를 배워 장차 조국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청년혈성단원들의 구국 열성은 본단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재미 한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림하는 1919년 8월 스스로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하였고, 노정민은 펜실베이니아주 애싱턴에 있는 미 해군 비행학교에, 우병옥은 디트로이트의 비행학교에, 박낙선은 리버사이드의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 

청년혈성단은 본단의 설립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1919년 8월 17일 다뉴바에서 청년혈성단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에 미국인들을 포함해 약 300명이 모였고 그 자리에서 청년혈성단의 정신과 목적 그리고 강령을 소개하였다. 또 ‘한국 혁명’이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해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청년혈성단의 결성은 노백린이 1920년 2월 윌로스에 설립한 한인 비행학교의 설립에 큰 힘이 되었다.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한 이초, 오림하, 이용근, 이용선, 한장호, 장병훈은 노백린의 독립전쟁론에 감화되어 졸업 후 윌로스 한인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노백린이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재미 한인들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과 아울러 잘 준비된 항공 인력 자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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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개최된 제2회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연회(1924.06.11~13.)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인의 미국 유학은 거의 힘들었으나, 일제의 통제를 피한 미국 유학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 3·1운동 이후부터 일제가 한국인의 해외 유학을 부분적으로 해제하면서 미국 유학은 급증하였다. 한인 유학생들의 도미가 이루어지자 유학생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결성된 곳은 1912년 12월 시카고에서였다고 하나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던 중에 1913년 6월 4일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던 학생들이 헤스팅스대학에 모여 한인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한인학생동맹(초대 의장 박처후)을 설립하였다. 최초의 유학생 단체로 알려진 한인학생동맹은 연 2회의 학생 영문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1914년 6월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을 창간하였다. 『한인학생평론』은 1916년까지 발간되고 종간되었는데, 이로 보아 한인학생동맹도 이때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 단체가 다시 결성되는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이다. 1918년 12월 30일 오하이오의 콜럼버스에 모인 학생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민족자결의 원칙이 약소민족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미한인학생연맹(회장 이춘호)을 결성하였다. 그런 후 1919년 2월 11일 학생 영문잡지 발간을 위한 발기대회를 거쳐 1919년 3월 처음으로 『Freedom and Peace with Korea Under Japan』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것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파리강화회의 기간 동안 한국의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발행하는 것으로 5월까지 3회 발행되었다. 이후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자 같은 해 6월부터 『한국평론(Korea Review)』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이 일로 기존의 북미한인학생연맹은 유명무실해졌으나 『한국평론』의 편집과 발행은 서재필의 지도 아래 학생들이 맡았다.  

3·1운동의 발발로 미주 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한인 유학생들은 전체 학생들을 결집하기 위한 단체 결성에 나섰다. 먼저 1919년 9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공동회를 열고 ‘학생연합회’(임시위원장 김현구)를 발기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의 학생들은 ‘미주한인유학생회’(회장 곽림대)를 발기하였다. 두 단체가 거의 동시에 발기된 후 김현구와 곽림대는 상호 통합을 위한 시도를 펼쳐 1920년 4월 ‘대한인학생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헌장 기초안을 마련하였다. 헌장 기초안에 따르면 새로 신설될 학생 단체의 이름을 ‘대한인북미유학생회’로 정하였다. 또 본부를 캘리포니아에 두되 경우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했고 『대성』이란 학생 월보 발간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20년 8월 25일까지 한정한 헌장 기초안에 대한 가부가 학생들의 참여 부족으로 확정되지 못하였다. 

임시 총무였던 남궁염과 이용직은 1920년 11월 11일 「북미대한인유학생포고서」를 발표하고 전자의 대한인학생연합회의 헌장 기초안을 토대로 새 헌장을 만들어 전체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4월 30일 하와이·샌프란시스코·윌로스·로스앤젤레스·파크빌 등 11개 지역 학생 대표들이 뉴욕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를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은 최다 득표를 얻은 이용직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은 차점자인 조병옥이 선정되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국내의 정치·사회문제에 중립을 지키고 지덕의 수양과 친교를 설립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영문 월보 『The Korean Student Bulletin』(1922. 12.∼ 1941. 04.), 국문 잡지 『우라키』(1925∼1936), 격월간 영문 잡지 『The Free Korea』(1942. 04.∼1944. 04.) 등을 발간하고 1923년부터 매년 여름 정기적으로 유학생대회를 개최하며 독립정신을 일깨움으로써 광복 대업을 이루어가는 데 힘썼다. 3·1운동은 청년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재미 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저변과 다양성을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