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경제적 자립으로
조국광복을 꿈꾸다

경제적 자립으로<BR />조국광복을 꿈꾸다

글 은예린 역사작가


경제적 자립으로

조국광복을 꿈꾸다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국권 상실 이후 우리 경제는 일본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갔다. 일본의 경제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민족적 자각은 3·1운동 직후 싹트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그 시절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쌓은 단결된 의지와 단합된 힘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현명한 대응에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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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취지문



경제 자립이 국가 존립의 근간이다

한 가정이 무너져서 가문이 몰락하고, 한 국가가 멸망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18세기 이후 서양에 패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찬란하고 거대한 역사를 안고 인류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장엄한 역사를 돌아보자.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멸망한 나라는 바로 진(秦)과 수(隋)다. 두 나라가 멸망한 공통점은 바로 군주가 덕치(德治)가 아닌 잔인한 폭정으로 백성을 통치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가 재정을 낭비한 탓이다. 

훗날 중국의 거대한 역사가 문을 닫을 때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이 도를 넘어섰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나라의 상황도 이와 흡사했다. 우리 민족이 36년이란 치욕스럽고 냉혹한 역사 속에 살아야 했던 출발점은 위정자들의 무분별한 국가 재정 낭비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주의 관념이 희박하였던 이들은 기득권 유지에 도취한 나머지 최소한의 책무마저 외면하였다. 오직 개인적인 부와 명예, 권력욕을 향한 사리사욕 추구에만 매달렸다. 외세에 아부하여 민초들의 권리와 존엄성, 노동력 등을 일제에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 한심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가지고 싶은 것을 사지 마라. 꼭 필요한 것만 사라. 작은 지출을 삼가라. 작은 구멍이 거대한 배를 침몰시킨다”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명언은 가정 경제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존망에도 근본적인 원인임을 일깨워 준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만국공법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열강은 수탈을 위한 침략을 근대문명 수혜로 강변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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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총회(1923.05.02.)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다

꿈 많은 젊은 청년들을 학도병으로 또 강제 징용으로, 어린 소녀들을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로 내몰았다. 당시 민중들은 자신의 꿈을 펼칠 여건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도,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의 희망도 사라진 암담한 시절이었다. 민족의 글도 읽을 수 없었고 언어도 사용할 수 없었으며, 오직 일본을 향한 짐승만도 못한 복종과 충성, 노예 같은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었다. 

우리 민족은 암울한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향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는 일은 너무나 시급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일제의 극악무도한 민족분열정책에 맞서는 한편 조국의 광복을 향한 새로운 돌파구를 향해 각 계층에서 동참하려는 분위기였다. 

무장투쟁, 외교활동,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한 교육 활동 등은 시대 상황과 맞물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선물산장려회’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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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산품 애용 부인회 강연회(1923.03.06.)



우리가 만든 것을 입고 쓰자 

조선물산장려회는 1920년 평양과 1923년 서울에서 각각 조직된 단체로서 어둡고 힘든 식민지 시기 경제 상황과 이를 극복하려 노력한 소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조만식·오윤선·김동원·김보애 등 70여 인이 모여 조직하였으며, 1920년 12월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전 강연회를 개최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래는 조선물산장려회 취지문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또 의지하여 살 것이 없으면 우리의 생활은 파괴될 것이라.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 참으로 사람다운 발전을 희망할 수 있으리오. 우리 생활의 제일 조건은 곧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적 기초라. 이 산업적 기초가 파멸을 당하여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으며 그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사람으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혹하였다. 오늘날 다국적기업에 버금가는 일제의 자본에 의해 한민족의 경제권은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민족의 자각을 촉구하고 경제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3·1운동 이후 한국인 기업이 설립되어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제의 자본은 본격적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1923년 관세가 대부분 철폐되자 일제 상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어왔다.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취지서를 통해 경제 진흥, 사회 발전, 실업자 구제, 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풍토 등을 내세웠다. 서울에서도 1922년 평양의 조직을 발판으로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이에 호응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를 통해 조선물산장려에 관한 표어를 모집하는 동시에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기 위한 순회강연도 마련해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렇게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민족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였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하였다. 창립총회에는 사회활동가·교육자·종교인·경영인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민족지도자들이 이사로 선출되어 조직 운영과 활동 방향을 정립하였다.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서 볼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위와 같이 조선물산장려회 궐기문에서는 민족의 경제 회복을 위한 강력한 활동 의지가 느껴진다. 조선인의 산업을 장려하고, 조선인이 만든 국산품을 애용하고,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조선 물품 애용을 장려하고, 조선인의 경제적 기반을 개선하기 위한 목표를 확립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계몽활동을 기획하여 전국적으로 가두행렬을 실시하고 조선 팔도의 특산 포(布)로 기를 만들어 내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경기도는 강화 반포(班布: 반베), 충청도는 한산 세저(細苧: 모시), 강원도는 철원 명주(明紬), 전라도는 전주 우초(牛?), 경상도는 안동 갈포(葛布: 삼베), 황해도는 해주 백목(白木), 평안도는 안주 고라(古羅), 함경도는 육진 환포(環布)로 제작하였다.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적극적인 보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청년연합회가 모집해 당선된 ‘내 살림은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는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민중들은 거리에서 물산장려운동을 부르짖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조선인이 만든 교복 착용을 권장하였다. 기생들까지도 이에 동참하는 등 대단한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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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평양 3개 단체 선전 행렬(1930.02.15.)



국민운동으로 승화되다

서울에서 시작된 전국적 조직체 결성에 이어 강연회, 일간지를 통한 선전활동과 계몽활동으로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를 비롯해 지방까지 파급되면서 그 호응도와 실천력은 뜨거워져 갔다. 특히 부녀자들의 열성적인 참여가 있었다. 서울의 부녀자들은 토산애용부인회를 조직했으며, 마산에서는 기생 40여 명이 동맹하여 토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평양부인회에서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와 합동으로 국산품 애용운동도 펼쳐나갔다. 

충북 영동청년회는 장날을 이용하여 포목기를 앞세우고 국악을 연주하며 수천 장의 전단을 뿌리면서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였다. 그 외 평남 성천·경남 부산·전북 군산에서도 기생들이 앞장서 토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또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에 소비조합을 설치하여 경제생활의 개선을 추구하였다. 자급자족, 국산품 장려,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을 실천 목표로 내세웠던 물산장려운동은 경제적인 자립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강한 감시와 살벌한 탄압이 이어졌다. 더욱이 국산품 가격이 급등하는 등 경영자와 상인들만 부유해진다는 비판도 사회적인 호응을 얻었다. 1923년 9월 칸토 대지진으로 사회적인 불안이 가중되면서 운동을 추진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조선총독부는 시국 불안을 구실로 탄압으로 일관하여 분위기를 반감시켰다. 계몽 강연 또한 일제의 분열 공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명맥만 유지하던 이 단체는 결국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로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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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산업계』 표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박완서 작가의 소설 『미망』을 떠올려 보자.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6·25전쟁까지 개성 지방의 거상 전처만 일가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운명과 가족사를 통해 그 시대 상황과 민족의 생활 모습, 인간의 오욕 칠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역할과 물산장려운동 정신을 함께 반추해 보자.

드라마 속 주인공 전태임은 일제의 탄압과 살벌한 감시 속에 개성 상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일제와 맞서 싸우며 우리 물품을 지키고, 일본인의 상권이 자신의 지역에 유입되어 조선 민중이 현혹되지 않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넘기면서 강인하게 일제에 맞서는 장면이 인상 깊다. 이러한 장면은 혼란스럽고 힘겨운 시절을 살았던 한민족의 단면과 같다. 경제 침탈에 물산장려운동으로 맞섰던 조선의 간디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와 서민들의 뼈아픈 고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36년 중 20여 년간 이어진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도 힘을 발휘해 대응하는 민족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결과는 미흡하였으나 목표와 과정은 훌륭하였다. 1997년 IMF라는 미증유의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이를 두고 세계인들은 부러움과 시샘이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책임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양분이다.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무서운 난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회피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이 아니다. 선조들의 참여를 통한 사회적인 책무는 밝은 미래를 위한 희망이라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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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포스터(1931.02.18.)